이제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대해 취할 수 있는 사회적 태도는 오직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도피, 또 하나는 참여입니다. 전자는 거부하는 마음으로 세상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것이며, 후자는 동정하는 마음으로 세상 쪽으로 향하는 것입니다. 전자는 세상에 대한 책임을 외면하는 것인데, 결국에 가서는 그 책임은 본디오 빌라도처럼 손을 씻는다고 해서 벗겨지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후자는 다른 사람들을 섬기느라 우리의 손을 더럽히고 아프게 하는 것으로, 이때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요동침을 느끼게 됩니다. 사실 많은 기독교인들 그리고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이 무책임한 도피주의자들이었다고 주저하지 않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곧 재림하실지도 모르므로 사회 참여는 시간 낭비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항상 있었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엉터리 신학으로 우리의 양심을 달래 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떠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자기의 목숨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분처럼 살고 사랑하며 증거하고 고난받고 죽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교가 의미하는 바입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요15:16).
J.B 필립스는 “우리의 하나님은 너무 작다” 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이말과 같이 우리는 성경의 살아 계신 하나님이 여전히 전 인류에게 그리고 전 인류의 온전한 삶에 관심을 갖고 계신다는 것을 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일 뿐 아니라 창조의 하나님이신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구약에서 유대인들이 끊임없이 저질렀던 실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언약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으로만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언약이 성경의 주요 주제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것만 강조하면 위험스러운 반쪽 진리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언약을 지나치게 강조했을 때, 그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지위를 약화시켜, 그들은 그분을 작은 한 종족의 신,곧 하찮은 신으로 축소시켰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세상을 창조하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이, 그들에게는 모압의 신인 그모스나 암몬의 신인 밀곰과 마찬가지인 히브리인의 신 야훼일 뿐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이들과 같이 만유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에 대한 비젼을 잊어버릴 수가 있기 때문에 당시 최강의 제국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다음의 고백을 늘 마음에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 기한이 차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이를 찬양하고 경배하였나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땅의 모든 사람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에게든지 땅의 사람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고 할 자가 아무도 없도다”(단4:34-35).
하나님은 죄인들의 구세주이시며,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며 화내기를 더디하시며 매우 온유하신 구속의 하나님이시지만, 또 한편으로는 만유를 다스리시는 정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정의의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부족할 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주된 관심은 교회 같은 종교적 건물, 예배나 기도 모임 같은 종교적 활동, 그리고 찬송가와 성경 같은 종교적 책들에만 있다고 생각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너무 왜소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종교에만 관심을 가지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인간의 생활 전체, 곧 일과 결혼과 가정과 문화와 국가에 관심을 가지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때로 이러한 것들이 마치 세속적인 것인 양, 그리고 영적인 사람들과는 관련이 없는 것인 양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으 그것들 모두에, 특히 사회 정의가 실현되어야 할 우리의 공공 생활에 아주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그 백성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분의 관심사를 공유해야만 합니다.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시로다 여호와께서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도다 여호와께서 맹인들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며 여호와께서 의인들을 사랑하시며 여호와께서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 시온아 여호와는 영원히 다스리시고 네 하나님은 대대로 통치하시리로다 할렐루야”(시146:7-10).
세속적 인본주의자들은 인간의 복지향상을 위하여 상당한 노력을 하여 때때로 그리스도인들보다 인간에 대해 더 인도적이고 더 동정적인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의 복지에 그렇게 관심을 가지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답변을 주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느낍니다. 예를 들면 ‘인본주의의 구조’라는 논문에서 줄리안 헉슬리는 인간이 인류에 봉사하는 유일한 이유는 앞으로 무한히 긴 시대에 걸쳐 진화되면서 실현될 인간의 잠재력 때문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즉 오늘날 인간을 섬길 가치가 있는 까닭은 수백만년 후에 인간이 진화해 있을 모습을 기대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형편없는 주장입니다. 왜냐하면 진화가 중요한 근거라면, 왜 노인들이나 정신지체아들, 만성 환자들 또는 기형아들을 돌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들 때문에 진화의 과정이 방해받지 않도록 그들을 애완견처럼 안락사시키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란 논리 역시 나오게 마련입니다. 나치 역시 우월한 종족만 살아남아 인류에 기여해야 한다는 논리를 펴서 이런 사람들을 전부 죽였던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러나 인본주의자들 대부분이 이러한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들의 마음이 그들의 머리보다 낫다는 것을, 그들의 박애 정신이 그들의 철학보다 낫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 반면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이유로 인류를 섬기고 있습니다. 그 근거는 미래에 진화될 모습 때문이 아니라 창조에 의해 이미 지어진 모습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고귀한 존재라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1:26-27).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아 유일하게 하나님을 닮은 피조물입니다. 우리는 사고하고, 도덕적으로 행동하며, 미적 즐거움을 누리고, 사랑하며, 사회 공동체를 이루고, 예배하며, 영적 경험을 누릴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하등 동물들과 완전히 분리됩니다. 물론 인간이 타락한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모두 상실하지는 않았습니다. 성경은 인간이 그 형상은 왜곡되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그리스도인에게 박애 정신을 고무시켜 주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닮은 인간은, 영원한 구원에만 관심을 가져야 하는 영적인 존재인 것만은 아닙니다. 또 먹고 입히고 치유하는 데만 관심을 가져야 하는 육체적인 존재인 것만도 아닙니다. 또한 그들이 속한 공동체의 복지에만 관심을 가져야 하는 사회적 존재에 그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인간은 무엇입니까? 인간은 사회 내에 있는 영적, 육체적 존재입니다. 이것이 인간에 대한 성경적으로 올바른 정의입니다.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육체적 존재이자 영적 존재로 그리고 사회적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의 육체와 영혼, 그리고 그의 공동체의 복지에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존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22:37-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