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의 육체와 영혼, 그리고 그의 공동체의 복지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이웃들 역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존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말씀을 전파하러 도처로 나아갔습니다. 복음만큼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훗날 그들은 학교와 병원 그리고 버림받은 자들을 위한 피난처를 세웠습니다. 노예제를 폐지하고 노예들을 해방시켰습니다. 공장 근로자들과 죄수들의 생활 조건을 개선시켰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서유럽에서 상업적으로 착취되지 못하도록, 동양의 사원에서 의식의 일환으로 벌어졌던 매음에 이용되지 못하도록 보호하였습니다. 오늘날 나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의 긍휼은 물론 현대적 의술을 제공하는 이들 역시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들은 시각장애인들, 고아들, 그리고 노인들을 돌봅니다. 마약 중독자들과 함께 지내며, 그들이 마약을 끊는 고통스러운 기간에 그들 곁에 함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인종 차별과도 싸우며, 정치적, 경제적 압제에도 저항합니다. 그들은 또한 도시 빈민굴의 상황에 참여하여 도시 빈민들을 돌보며, 많은 사람들에게 부여된 비인간적인 조건을 극복하고자 노력합니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 빼앗긴 자들, 굶주린 자들 그리고 혜택받지 못한 자들과 연대하여 이를 행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매우 간단합니다. 그것은 모든 남녀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았다는 가르침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1: 27).
모든 인간 즉 남자나 여자나 어린이나 노인이나 할 것 없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다는 가르침은 모든 인간에게는 어떠한 상태에 있든지 본질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가 병들었든지, 죽어가고 있든지, 부자이든지, 가난하든지, 나이를 먹었든지 아니면 갓 태어났든지, 성별이나 국적과 종족에 상관없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다는 본질적인 가치 그래서 존엄하게 대해야 한다는 진리를 마음에 새겨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대한민국 역시 헌법에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10조)라고 못박고 있는 것입니다. 이 조항이 무너지면 전 헌법이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국민투표로 헌법을 개정하려고 하여도 이 조항 만은 개정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았기 때문에 양도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깨닫게 되면,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데 헌신할 것이며, 또 인간이 더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그들을 섬기는 것을 특권으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인간 해방의 역사가 일어난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합니다. 대한민국도 같습니다. 19세기 말엽 선교사들이 들고 온 복음으로 먼저 여성해방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신분의 차별이 실질적으로 해소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합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
프레드릭 트레브스 경은 빅토리아 시대 말엽 런던 병원에 근무하고 있던 유명한 외과 의사였습니다. 1885년 그는 병원 맞은 편에 자리한 빈 야채 가게에서 훗날 코끼리 사람이라 알려진 한 생물체를 발견하였습니다. 트레브스는 그를 ‘내가 본 사람 중 가장 혐오스럽게 생긴 기인’이라고 묘사했습니다. 이마와 윗턱에 불쑥 튀어나온 뼈와 더불어, 엄청나게 일그러진 모양의 머리로 인해 그의 외모는 코끼리를 연상시켰습니다. 버섯 또는 양배추와 같이 푸석푸석하고 악취 나는 피부가 그의 등,가슴, 머리 뒤편 그리고 오른팔에 자루처럼 늘어져 있었습니다. 다리는 불구였고, 발에는 구근이 있었으며, 고관절염에 걸려 있었습니다. 표정 없는 얼굴로 침을 튀기며 말하는데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왼팔과 손은 여자처럼 섬세하고 맵시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고통을 더해 주듯 그는 동물처럼 취급받았습니다.그는 이 시장 저 시장, 이 서커스 저 서커스로 팔려 다니며 호기심 많은 사람들에게 2펜스씩 전시되었습니다. 그는 개만도 못한 대우를 받았으며, 뚫어져라 쳐다보는 사람들의 눈총이 무서워 어두컴컴한 구석으로 기어 들어가곤 했습니다. 그러나 트레브스는 그가 인간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존 메릭이라는 이름을 가진 21세의 남성이었으며,높은 지능을 가졌으며, 예리한 감성과 낭만적인 상상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 불쌍한 사람이 서커스 단장에게 버림받았을 때, 트레브스는 그에게 런던 병원 뒤편의 방을 마련해 주었으며 그를 돌봐 주었습니다. 처음으로 한 여성이 존 메릭을 방문하여 그에게 웃음을 띠며 인사하고 악수하면서 인간적인 존엄성을 갖고 대했을 때, 그는 주체할 수 없이 흐느끼며 울었고 바로 그날부터 변화되기 시작했으며, 많은 저명인사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3년 6개월 뒤 세상을 떠났습니다. 우리는 그가 사람으로서 어느 정도 자존감을 얻게 된 것이 트레브스의 인간 생명에 대한 남다른 존중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마8:2-3).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가져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수많은 예수, 다양한 이미지를 가진 예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예수를 믿고 있습니까? 우리는 성경적 그리스도, 즉 무엇보다도 가난한 자들, 혜택받지 못한 자들, 세리와 죄인들, 굶주린 자들과 버림받은 자들을 헌신적으로 사랑하셨던 예수를 생각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특히, 우리가 이른바 성탄의 그리스도, 즉 성육하시고 실제로 우리 세상에 들어오셔서 우리의 육신과 피와 인간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을 회복해야만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안전한 곳에 머무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광을 스스로 비우시고 섬기기 위해 낮아지셨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만 합니다. 주님은 하찮고 약하고 상처입기 쉬운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고통과 소외 가운데로 들어오셨으며, 우리가 받는 유혹들을 몸소 받으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을 뿐만 아니라, 병자를 치료하시고 주린 자를 먹이시고,죄지은 자를 용서하시고, 버림받은 자들을 친구로 삼으시고, 죽은 자를 일으키심으로써 그 나라를 나타내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고 자기의 목숨을 많은 사람들에게 주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도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셨으며, 어두움 가운데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 외치시면서 죽으셨던 분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동시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대권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만 천하에 선포하셨습니다. 이것이 신약성경이 증거하는 진정한 예수라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고전1:30)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선교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를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복음 전도와 사회적 책임을 결합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말과 행위 그리고 복음 전파와 연민에 찬 봉사가 함께 했다는 사실을 충분히 고려하면서 섬김의 삶을 살아 왔는지를 생각해야만 합니다. 그분의 행위는 말씀을 표현한 것이며, 그의 말씀은 그분의 행동을 설명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결합하신 것을 분리하지 말아야만 합니다. 행위가 없는 말씀은 신뢰성이 부족하며, 말씀이 없는 행위는 명료성이 부족합니다. 우리가 선포하는 메시지대로 행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그 메시지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인 반면, 우리가 우리의 행동을 설명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우리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말씀은 추상적이므로, 구체적인 사랑의 행위로 구현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행위는 모호하기 때문에, 복음 선포에 의하여 해석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과 행위가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서 하나였다면, 오늘날 교회 사역에서도 하나여야 합니다.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 (전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