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 말과 행위를 결합하신 것과 같이 우리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남미 지역에 레오니다스 프로아네오 라는 로마 가톨릭 주교가 있었습니다. 그는 에콰도르의 수도인 키토에서 남방으로 160킬로미터가량 떨어진 리오 밤바 교구의 주교였습니다. 성경에 바탕을 둔 생각을 갖고 있던 주교는 사회 정의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특히 인디언들의 문화가 보존되기를 원했습니다. 이와 동시에 그는 국가와 교회 제도 양 체제에 비판적이었고, 봉건 제도와 부유한 지주들의 세력에 반대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암살하려는 시도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이 이야기를 처음 듣고, 목사님 자신을 암살라려고 시도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을 발견하고 자신이 그럴 만한 가치가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슬프게 자책하면서, 때때로 우리를 암살하려는 시도가 우리가 진정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 시험하는 좋은 잣대가 아닌지 생각해 본다고 하였습니다. 즉 참된 기독교는 사회를 위협하는 것이어서, 그들이 예수를 없애려 했고 또 사도들을 없애기 원했던 것처럼 우리도 없애고자 하는 것이 이해할 만하다고 말할 정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너무도 자주 진정성을 잃기 때문에 사회로 하여금 우리를 없애야겠다고 결심하게 할 만큼 사회를 귀찮게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는 이런 면을 한 번 되새겨 보면서 너무나도 우리 자신의 문제에만 몰두하여 소금과 빛으로서의 성도의 삶이 퇴색한 것은 아닌가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런데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어떻게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그런 것은 아무 쓸모가 없어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뿐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있는 마을은 잘 보이기 마련이다.”(마5:13-14).
프로아네오 주교를 암살하려는 시도는 여러 번 있었습니다. 1973년 칠레의 좌파 성향의 대통령 아옌데가 죽은 후 프로아네오 주교는 에콰도르의 수도 키토에서 미사를 집전하면서 몇몇 마르크스주의 학생들에게 강론했습니다. 그는 예수를 급진주의자, 기존 제도의 비판자, 가난한 자들을 사랑하는 자, 복음을 선포하셨을 뿐 아니라 연민에 찬 봉사를 행하셨던 억눌린 자들의 투사로 묘사했습니다. 미사 후에 질문 시간이 있었고, 몇몇 학생들이 그에게 다음과 같이 중요한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진작 이런 예수를 알았더라면 결코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 대목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가짜 예수를 선포하는 까닭에 일부 학생들 및 청년들이 칼 마르크스의 품으로 이끌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우리의 연민은 어디에 있습니까? 가난한 자들과 억눌린 자들에 대해 우리 그리스도인들보다 마르크스주의 학생들이 더 많은 연민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도 해 보아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에 대하여 좀 더 나은 교리를 가져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모든 교훈의 정상에 우뚝 서 있기 때문입니다. “끝날에 이르러는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며 작은 산들 위에 뛰어나고 민족들이 그리로 몰려갈 것이라 곧 많은 이방 사람들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도를 가지고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니라 우리가 그의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그가 많은 민족들 사이의 일을 심판하시며 먼 곳 강한 이방 사람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미4:1-3).
우리 가운데 ‘구원’이라고 하면 너무나도 좁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때때로 그 말은 우리 죄에 대한 용서를 의미할 뿐이라고 생각하며, 밤에는 베개 밑에 천국행 개인 여권을 갖고 있다고 꿈꾸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우리는 구원을 사사로운 것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구원은 나의 영광이 될 것이다” 라며 우리는 그것을 개인화합니다. 이에 반해 우리는 구원의 사회적 의미를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을 개인화로부터 건져 내고, 그것에 관한 온전한 성경적 교리, 즉 죄의 용서뿐 아니라 우리가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때까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것과 관련된 가르침을 회복해야만 합니다. 특히 우리는 성경이 함께 묶은 것을 분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몇 가지 중요한 사항을 논의하고자 합니다.
첫째, 우리는 구원자와 주님을 분리해서는 안 됩니다. 일부 사람들은 예수님을 구원자로 받아들이고 나서 몇 년 후에 주님으로서 그에게 복종할 수도 있다고 말하나, 그와 같은 가르침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부활시켜 당신의 보좌 우편에 앉게 하셨고 그를 주로 높이셨습니다. 그가 사람들을 구원하실 수 있는 까닭은 그가 하나님 우편에 앉을 수 있는 지위에 계시며, 그 지위에서 나오는 집행권과 권능을 가지신 주이기 때문입니다. 그 지위에서 성령님도 신자들에게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서 인정할 때에만 비로소 그분을 구원자로 영접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롬10:9-10).
둘째, 우리는 사랑과 믿음을 분리해서는 안 됩니다.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믿음을 강조해 왔습니다. 우리는 신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사랑하는 자로 알려지는 것이 더 낫다고 봅니다. “오직 믿음으로”는 16세기 종교개혁의 표어였는데, 옳은 주장입니다. 칭의, 곧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짐은 우리의 어떤 가치가 있는 행위나 종교적 수준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초로 하여, 오직 그의 은혜에 의하여 그리고 오직 믿음을 통해서 우리를 받아 주십니다. 우리는 16세기 종교개혁자들만큼 강하게 그것을 믿습니다. 칭의는 오직 믿음에 의해서 이루어지지만, 그 믿음은 홀로 설 수 없습니다. 그것은 선행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거짓임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야고보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또한 바울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6에서 “사랑으로 행하는 믿음”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참된 믿음은 역사하며, 사랑의 선행 가운데 나타납니다. 그래서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라”(갈5:13) 명령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사랑으로 작동하여 사랑으로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은 사랑 가운데 나타나며, 참된 사랑은 봉사 가운데 나타납니다. 이처럼 믿음이 구원에 필수적이긴 하지만, 사랑을 희생하면서까지 믿음을 확대 해석하면 안됩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이 없는 믿음은 아무것도 아니며,또 믿음이 사랑의 행위를 낳지 않으면 그것은 엉터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구원하는 믿음과 섬기는 사랑은 늘 함께 하지, 그 어느 것도 홀로 존립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고전13:2).
여러분은 교회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많은 사람이 교회를 일종의 동아리 모임, 즉 구성원들의 공동 관심이 골프 대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골프 동아리 모임과 똑 같은 그리스도인 동아리 모임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에게 교회란 함께 종교적인 일을 하는 종교적인 사람들로 구성된 모임입니다. 여러분이 교회를 하나의 동아리 모임으로 생각하게 되면, 여러분은 동아리 회원의 특권에만 집중하고 “교회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비회원들의 이익을 존재하는 단체”라는 윌리엄 템플의 훌륭한 격언을 망각하게 됩니다. 다른 모든 단체들은 구성원들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며, 구성원의 특권에 관심을 집중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책임을 집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된 책임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에 있으며, 또 세상 가운데서 봉사하고 증거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그러한 견지에서 생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그의 백성이 이 땅의 소금과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한 비유들은 사회가 썩어 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교회가 주어야 하는 영향을 가리킵니다. 빛이 어두움을 비추듯이,교회는 세상 사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이러한 보존적 기능과 계몽적 기능은 교회가 지고 있는 책임의 두 가지 핵심적 부분입니다. 이 두 가지 핵심적인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때 사회의 어두운 구석이 밝아지고, 썩는 것이 멈추는 것입니다. 당연히 사람들은 이런 교회를 우러러 보게 되며 그리스도의 복음 역시 잘 전파될 것입니다.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 올려지셨느니라”(딤전3:1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