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우리 주위의 사회가 악화되어 가는 것을 볼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보통 자기 의에서 나온 혐오감을 갖고 어깨를 으쓱하며, 주위 세상 가운데서 폭력, 거짓, 탐욕, 풍요, 그리고 음란물을 목격하고 그것들을 비판합니다. 우리는 자기 의에 차서  “세상을 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세상이 잘못되어 간다면 그것은 누구의 잘못입니까? 고기가 썩어 갈 경우,고기를 탓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박테리아가 번식하도록 내버려 두면 저절로 그렇게 됩니다. 문제는 소금이 어디에 있느냐에 있습니다. 한편 집이 어두울 경우 밤을 탓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해가 지면 저절로 그렇게 됩니다. 문제는 “교회가 어디에 있느냐”에 있습니다. 사회가 부패해 간다면 그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대한 더 나은 교리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교회가 세상 가운데 있고, 세상이란 교회가 봉사하고 증거하도록 부름받은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대한 민국이 과거 독재정권의 압제로 어두웠고 그로 인해 국민들이 신음을 할 때 많은 교회는 침묵을 지켰지만, 그러는 중에도 천주교회는 상당한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명동성당은 경찰들이 진입하지 못하는 성지와 비슷하게 인식이 되어 정권으로부터 피해를 당한 분들의 피난처로, 그리고 목소리를 내는 장소로 큰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이때 김수환 추기경은 국민들의 정신적 지주로 존경받았습니다. 이뿐 아니라 김재준, 박형규, 문익환 등 적지 않은 개신교 목사들과 서울의 새문안 교회와 같은 여러 교회들이 박해받을 것을 잘 알고도 독재정권에 저항하여 국민들과 함께 고난을 받고 감옥에 들어가는 고난을 겪으며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는 주님의 가르침에 충성한 모범을 보였습니다. 산상 수훈의 8복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시작한 뒤 그 끝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에게 천국이 주어진다고 맺음하고 있음을 우리는 생각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마지막 날에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을 생각하고 신실하게 살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사42: 1).

일반적인 견지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복음 전도와 사회 활동 둘 다 부름받았습니다. 우리 각자는 주 예수를 따르는 자입니다. 그런데 주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한 ‘훌륭한 신앙 고백’을 증거하셨을 뿐만 아니라,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가운데 있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그는 증인이셨으며 또한 종이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를 따르는 자라면,증인이자 또한 종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도 이 의무 가운데 어느 하나도 회피할 수 없습니다. ‘디아코니아(섬김)’과 ‘마르투리아(증거)’는 분리될 수 없는 쌍생아입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이 두 가지 모두에 헌신하여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각자 다른 전문 사역으로 부름받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회 봉사와 의료, 또는 다른 돌보는 작업들 중의 하나에 전문적으로 종사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또 다른 이들은 가사로, 또 다른 이들은 목회 사역으로, 비즈니스에 종사하도록, 운동선수 등으로 부름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서로 다른 전문 사역으로 부름받았다는 말은 더할 나위 없이 올바른 것입니다. 그러나 양극화는 전문화와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우리는 복음 전도와 사회 활동을 양극화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 두 가지 모두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책임이나, 수 많은 일이나 직업 가운데 특히 우리는 처한 환경이나, 은사에 알맞게 어떤 일에 전문적으로 종사하도록 부름받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문적인 일에 주로 종사하면서 섬기되,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자신의 전문 사역 분야가 아니더라도 봉사하고 증거해야 할 책임이 주어지게 됩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 4-7).

우리가 우리의 전문적인 일에 종사하다가 긴급한 상황이나 또 기회가 주어질 경우, 섬김과 증거라는 이 두 가지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일반적인 책임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은 “우리는 종교적인 사람이 되도록 부름받았지, 사회적 양심을 갖도록 부름받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얻어맞고 누워 있는 이 가련한 사람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말함으로써, 강도 만난 자에 대한 자신들의 수치스러운 무관심을 변명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긴급한 경우에는, 자신의 전문 사역 분야가 아니더라도 봉사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와 반대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사회 봉사 또는 의료에 부름받은 사람이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했을 때, “나는 의사가 되도록 부름받았다. 복음을 증거하는 것은 내 책임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증인이자 종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특히 맡아서 하는 일이 무엇이든지 간에 긴급한 경우에 그리고 기회가 올 때, 우리는 이 두 가지 모두를 행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섬김과 증거에 대해서도 좋은 본보기를 보여주었습니다. 배고픈 사람들에게는 오병이어 기적을 일으켜 양식을 직접 나누어 주셨고, 가난한 자들에게는 돈을 주는 대신 복음을 전파하셔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도록 하셨습니다. 외로운 죄인과 세리들에게는 친구가 되어 주셨고, 마지막에는 당신의 몸을 십자가 위로 던져 우리 죄를 담당하심으로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고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나아올 수 있도록 길을 여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엡4:13).

지역교회는 다양한 사역이 함께 모이는 자리입니다. 지역교회는 특별한 지역 또는 지구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모임입니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은사, 다양한 소명 그리고 다양한 사역을 가진 구성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목사들은 동일하거나 유사한 은사와 사역을 가진 지역교회의 구성원들이, 특정한 관심을 가진 자들의 모임을 결성하여 연합하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복음 전도의 책임을 지닌 그룹, 사회 봉사의 책임(병자들과 노인들을 돌보는 것)을 지닌 그룹, 지역 사회에 살고 있는 소수 인종들에게 관심을 갖는 그룹, 공중 예절과 음란물에 관심을 가진 그룹, 정신 지체아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에 관심을 가진 그룹 등이 그런 모임들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교회는 모든 그룹에 동등한 관심을 갖고 그들이 전체 교회로 돌아와 보고할 기회를 갖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면 전체 교회의 사역은 신약 시대의 사역만큼 깊이를 갖게 될 것이며 아름답고도 건강해 질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는 구성 멤버가 늘어나면서 점점 다양한 사역을 펼쳐갈 수 있게 되어 교회 내는 물론 교회 밖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잘 감당하게 되며, 그 결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벧전4:11)

지금까지 우리는 다섯 가지 기초적인 기독교 교리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모두가 세상에 대해 우리가 지닌 책임과 관계가 있으며, 또 우리는 각각 교리, 즉 하나님, 인간, 그리스도, 구원, 그리고 교회에 대한 교리를 성경적으로 완전하게 견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교리를 마음에 새기고 구원과 섬김이 필요한 세상으로 나가야만 합니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예배드리러 간다는 말을 통상 ‘미사(Mass)’를 드리러 간다는 말로 대신 사용합니다. ‘미사’ 라는 말은 로마 카톨릭 미사에서 드리는 기도문의 마지막 구절인 ‘ite missa est’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것은 점잖은 말로 번역한다면 “가십시오. 해산합니다”가 되겠지만, 통속적인 말로 옮기면 “이제 나가시오”가 됩니다. 고대에서 ‘미사’는 단순히‘해산’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지만, 기독교적으로 사용되면서 점차적으로 더 깊은 의미를 가지게 되어 ‘해산’은 임무(mission)라는 뜻을 내포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주일에 예배드리고 주중에는 증거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으로 나가야만 합니다. 하나님과 닮은 인간들이 살고 있는 세상으로 나가야만 합니다.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고통받으셨고 죽으셨던 세상입니다. 거기로 나가야만 합니다. 거기로 가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우리의 삶 속에서 드러내고 남을 섬기는 역사가 일어나야만 합니다. 그 결과 모든 일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요20: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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