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그리스도인은 비기독교적 세상과는 구별되는 도덕적, 윤리적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구별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남들과 똑같아지는 것을 좋아합니다. 물론, 주변에 자신을 홍보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주의를 끌고 자신을 선전하기에 급급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에 띄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군중이라는 익명성을 더 좋아합니다. 다른 사람과 구별되지 않고 적당히 묻혀 살 수 있는 문화적 배경의 동질성을 더 좋아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동질성 가운데 안전함을 느끼며, 이런 이유로 우리 가운데 이질적인 사람이 있으면 불쾌감을 느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슷하지 않은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유사함은 인간의 특징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들을 지키기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를 구별된 사람으로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성경 전체에 걸쳐, 또는 적어도 창세기 12장부터 끝까지 줄곧 흐르고 있는 주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4천년 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집을 떠남으로써 우상 숭배에서 벗어나라고 명령하시고는, 그가 유업으로 받게 될 땅으로 가서 살아 계신 참된 하나님을 경배하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될 것이며 너와 네 후손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후 하나님은 그들이 모든 사람과 구별되게 하기 위하여 그들과 언약을 맺으셨던 것입니다. 구약은 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된다는 것은 나머지 인류와 구별되어 하나님의 고유한 백성이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율법의 일부로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레위기 초반부(18:1-5), 즉 “너희는…..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 너희는 내 법도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그대로 행하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는 명령은 매우 강한 어조를 띠고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행하는 모든 것을 행하지 말라” 즉 우리는 고유해야 하며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산상수훈에서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구별되라고 명하십니다. 산상수훈의 지배적 사상은 마태복음 6장과 7장에 드러나 있습니다. 여기에는 다섯 단어가 있는데, 그 각각은 단음절로 이루어져 있어서 말하기가 매우 간단하고 이해하기도 쉽습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과 관련해서는 심원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들을 본받지 말라” 이 말은 레위기 18장에 있는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따르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와 같은 말입니다. 예수님도 이와 똑 같은 말씀, 곧 “그들을 본받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와 다른 유의 사람들, 즉 이방인들과 종교인들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본받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들과 달라야 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마5:44-45).

우리는 소금과 빛의 비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소금과 빛은 예나 지금이나 보편적인 일용품입니다. 예수님 당시 팔레스틴에서는 이 물품들이 모든 가정에서 매일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렛에서 소년 시절을 보낸 이래로 이것들에 대해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는 종종 자신의 어머니 마리아가 부엌에서 소금을 사용하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냉장고가 없었기 때문에 고기가 상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고기를 소금에 절여 보관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자들로 하여금 사회에 미치게 하기 원하셨던 영향 또는 충격을 설명하시기 위하여 소금과 빛이라는 두 가지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12명에 불과했지만, 그들은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했고, 세상의 빛이 되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성령 충만한 소수의 힘에 대해 예수님이 얼마만한 확신을 가지셨는지는 놀라울 정도입니다. 우리의 조국이나 대학에서 소수라도 마음을 다하여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면, 우리는 그 사회의 소금 또는 그 공동체의 빛이 될 수 있습니다. 소금과 빛의 비유로부터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1. 그리스도인들과 비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2. 소금과 빛의 비유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에 침투해 들어가야 한다는 점을 가르친다. 3.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비그리스도인의 공동체에 침투해 들어갈 때는 자신의 고유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 내일부터 이 세 가지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3-16).

그리스도인들과 비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소금과 빛의 비유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와 비그리스도인 공동체를 분리시킵니다. 이 두 공동체는 상호 대조적으로 존립합니다. 한편에는 세상이 있습니다. 이 공동체는 어두운 밤, 죄의 밤, 악의 밤, 비극의 밤, 슬픔의 밤, 소외의 밤과 같습니다. 우리는 어두운 세상에서 빛이 되어야 합니다. 게다가 세상은 썩어 가는 고기와 같은 곳입니다. 우리는 세상과 구별되어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과 세상은 하늘과 땅처럼 다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과 세상이 빛과 어두움처럼, 소금과 부패한 고기처럼 다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소금과 빛의 비유는 그리스도인들과 비그리스도인들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나 소금과 빛의 비유는 그리스도인들이 비기독교적 세상과 비그리스도인 공동체에 침투해 들어가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여러분의 빛을 어두움 가운데 비추어야 합니다. 등잔을 침대 밑이나 물통 안에 감추어 두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등잔을 당연히 등잔대 위에 올려놓습니다. 빛을 두는 목적은 집안을 밝히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소금의 목적은 고기에 뿌려져 고기가 부패되는 것을 저지하거나, 적어도 늦추는 것입니다. 소금이 창고에만 쳐박혀 있다면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사회를 절여야 합니다. 우리는 고상하고 작은 교회라는 창고에만 머물 것이 아니라 비기독교적 사회에 침투해야 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소금의 효과는 소극적입니다. 즉, 부패를 방지하는 것입니다. 빛의 효과는 적극적입니다. 즉, 어두움을 비추는 것입니다.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의 효과는 우리의 사회적 책임을 특히나 강조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회가 점점 타락해 가는 것을 막는 소금처럼 말입니다. 반면에 어두움을 비추는 빛의 효과는 예수님의 빛을 퍼뜨리는 우리의 복음 전도라는 책임을 강조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보내신 공동체로 침투해 들어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사회적 책임이나 복음 전도 가운데 그 무엇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한편,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비그리스도인 공동체에 침투해 들어갈 때는 자신의 고유성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고유성을 잃으면서 침투해 들어가는 것은 고유성을 간직만 하고 침투하지 않는 것만큼이나 무가치합니다. 소금은 고기에 침투해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이때 그 짠 맛을 잃어서는 안됩니다. 짜지 않은 소금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심지어 퇴비더미에 던져 버릴 수조차 없게 됩니다. 그런 소금은 발에 짓밟혀 길을 만들기 위한 재료가 되는 것 외에는 아무 역할도 할 수가 없습니다. 소금이 그 짠 맛을 간직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빛 또한 그 밝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그리고 밝게 빛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윤리적 고유성,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으면서 우리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동일화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는 동일화가 소금과 빛의 비유가 함축하고 있는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위해 세상으로 들어가고자 할 때, 우리는 우리의 기독교적 확신, 윤리 기준들, 기독교적 가치 체계를 상실하지 말고 주님의 돌보심을 믿고 의를 행해야 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사4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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