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예수님은 우리를 좀더 큰 의로 부르십니다. 이 의(義)는 비기독교적 세상의 의보다, 심지어는 타종교의 의보다 더 큽니다. 마태복음5:20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예수님의 이런 말씀을 들었을 때 제자들이 얼마나 놀랐을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의로운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그들은 구약성경을 연구했습니다. 그들은 구약에 248개의 명령들과 365개의 금지 사항, 즉 모두 합해 613개의 하나님의 법령이 있다는 것을 계산해 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명령 가운데 많은 것을 지켰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은 우리 의가 그들의 의보다 더 크지 못하면, 하나님의 나라에서 위대해지기는커녕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조차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이렇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예수님 ,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 겁니까? 그들은 율법의 의로는 흠잡을 데가 없는 이들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뜻하신 바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뜻하신 바는 그리스도인의 의가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크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의는 마음의 의, 사고와 동기에서 나오는 내적인 의이지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외적인 의가 그 기준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의 해석에서 바리새인들은 살인행위 자체를 하지 않으면 그 마음에 미움을 가지고 있어도 의의 기준에 적합한 것이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마음에 미움을 품고 있으면 벌써 살인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 차이를 보이는 부분입니다. 당연히 그리스도인의 의가 훨씬 뛰어난 것입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5:21-22).

그리스도인의 의의 기준은 단순한 외적 행위가 아니라 마음과 동기의 부분에까지 미치는 의이기 때문에 어떤 종교나 윤리적 가르침보다도 더 심원한 의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의로운 요구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거듭나지 않고서는 결코 의로워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독교적 삶은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이런 산상수훈의 가르침에 복종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고 주저않을 수 역시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기적이고 죄된 마음을 변화시키거나, 마음을 청결하게 하거나, 마음의 의를 계발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새로운 마음이 필요함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막7:21-2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와 같이 이러한 것들은 사람의 악한 마음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마음으로 의롭게 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오직 성령님의 능력으로 거듭남으로써만 가능합니다. 그리고 산상수훈 전체가 이 거듭남을 전제로 한다는 것은 두말 할 나위도 없습니다. 이것은 새로 태어난 자의 새로운 의입니다. 거듭남이 없이는 새로운 삶은 물론 새로운 의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암시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요5:5-7).

마태복음 5장 끝에는 6개의 이른바 대구 또는 대조 구절이 있는데, 그것들 각각은 다음과 같은 공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러면 이들 여섯 가지 가운데 처음 두 가지를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는 살인을 금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간음에 관한 것입니다. 십계명은 매우 분명하게 “너희는 살인하지 말라”, “너희는 간음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좋소. 우리는 그들 중 어느 계명도 범하고 있지 않소.” 그렇습니다. 그들은 외적인 의로는 그중 어느 것도 범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살인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간음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당하지 못한 화는 살인과 같으며, 음란한 마음을 품고 여자를 보는 것과 음란한 생각은 하나님께는 간음과 마찬가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이 의미하신 바는 22절에서 분명히 나타납니다.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이유없이’라는 말이 있든 없든 그 의미는 분명하다) 심판을 받게 되고.” 27-28절에서는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고 하시며 또다시 마음에 대한 언급을 하십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의는 마음의 의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이 내적인 화가 살인이라는 형태로 드러나지 않을지라도, 우리가 마음으로부터 화를 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그러나 누가 이러한 것들을 하기에 충분합니까?” 라고 물어야 합니다. 이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배하시는 자들에게만 가능한 의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의는 마음의 의이며, 이 마음은 우리가 주님께 굴복해야 할 마지막 요새이기도 합니다.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롬2:28-29).

마태복음 5:43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는 들었다”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이 말은 구약 율법을 매우 그릇되게 인용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을 아무리 찾아보아도 이런 명령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원래는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레19:18)고 되어 있습니다. 바래새인들은 그 명령을 자신들의 궤변적인 방법으로 해석하여, “내가 사랑해야 하는 이웃은 누구인가?” 라고 묻고는 대답을 하였습니다.그러나 그 대답은 너무나도 편협해서 그들이 율법을 복종하는 데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물론 나의 이웃은 나와 같은 유대인이다. 따라서 율법에 의하면 이방인은 미워해도 된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신들의 저급한 도덕 기준에 적합하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켰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민족적 편견과 증오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교묘하게 조작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에 대한 서기관들의 그릇된 해석들에 단호하게 반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의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에는 동료 유대인뿐 아니라 원수도 포함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진리를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설명하셨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말씀하고자 하신 요점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한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눅10:36-37).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의 요점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사랑한다면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섬겨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결코 꿈도 꾸어 보지 못했던 것을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자에게 행했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이 일종의 문화적 장벽을 넘어선 봉사를 행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강조하셨던 점입니다. 우리의 이웃은 인종적,종교적 배경과는 상관없이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이 어려움에 처해 있다면 우리는 문화, 종족, 국가,종교 또는 그 무엇과도 상관없이 그를 섬기도록 부름받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계속해서 44절에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우리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율법의 요구에 대한 참된 해석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더 높은 요구입니다. 이 명령에 순종할 때에만 우리는 자신이 진정한 자녀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5:4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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