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들은 구약의 하나님을 오직 이스라엘의 하나님, 즉 모든 민족 가운데 한 민족을 택하셔서 그들을 구속하시고, 그들과 언약을 맺으셔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을 그의 백성으로 삼으시겠노라고 약속하신 분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는 진리의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하나님 야훼를 모압의 신인 그모스나 암몬의 신인 밀곰과 같은 히브리인들의 신 정도로 격하시켜서는 안 됩니다. 구약은 하나님이 모든 우주의 창조자이시고 모든 민족의 주이시며 모든 인간의 하나님이심을 계시합니다. 아브라함 한 사람을 부른 창세기12장의 기사 역시 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이라는 한 사람과 한 가족을 택하셔서 그들을 통하여 지상의 모든 가족에게 복을 주겠노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한 사람을 택하신 것은 모든 사람에게 복을 내리시기 위한 목적에서였습니다. 구약의 비극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우주적 전망을 망각하고, 선택의 교리를 편애의 교리로 강등시켰다는 데 있습니다. 이를 정정하기 위하여 예언자들은 계속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궁극적으로 모든 민족이 하나님의 목적에 포함될 것이며, 모든 민족이 예루살렘으로 순례할 것이며, 모든 민족에게 메시야가 올 것이며, 하나님의 종이 모든 민족을 밝힐 빛이 될 것이라는 점을 환기시켰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하나님은 선교의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이사야 2: 2-3).
데이비드 리빙스톤은 1850년 여동생 아그네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습니다. “우리가 왕 중 왕으로부터 받은 명령을 준수하는 것을 희생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해라. 나는 온 마음과 온 영혼을 다해 선교사로 섬기고 있다. 하나님은 유일한 한 아들을 가지셨다. 그 아들은 선교사이며 의사이셨다. 정말이지 나는 그분을 어설프게 모방하는 자에 지나지 않는다. 아니 그렇게라도 되기를 소원한다. 하지만 나는 그분을 섬기는 가운데 죽기를 소원한다.” 우리 주님을 선교하시는 분으로서 이해한 좋은 예입니다. 지상에 계실 때 예수님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자신의 사역을 한정시켰습니다만, 이는 당신의 지상사역만을 언급하는 일시적인 상황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시적이고 역사적인 제한된 지상사역을 하시는 중에도 예수님은 많은 사람이 동서로부터 올 것이며, 하나님 나라에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함께 앉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부활하신 후에 갈릴리로 가셔서 제자들에게 이른바 대 위임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그 명령의 전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는 말씀과 같이 부활하신 주님이 우주적 주권을 하나님께 받으신 사실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며 또 자신의 우편으로 높이시고 그분에게 이 우주적 주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우주적 선교는 예수님의 우주적 권위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에게 “가서 제자를 삼으라”고 분부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8-20).
장막절 중 어느 날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많은 군중들 가운데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요7:37-38)고 외치셨습니다. 이런 외침은 주님이 성령님의 선교적 본질과 선교적 사역에 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한은 바로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39절)고 덧붙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주님은 성령님을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로부터 흘러나와 세상의 메마른 영적 사막을 축이는 생수의 강에 비유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공회의 윌리엄 템플 감독은 다음과 같이 주석하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영을 소유하거나 그 안에 거하는 상태로 머물 수만은 없으며 또 그 영을 자기 자신에게 붙들어둘 수만도 없다. 영이 있는 곳에서는 반드시 영이 흘러나간다. 만일 영이 흘러나오지 않는다면, 영이 거기에 계신다고 말할 수 없다.” 여기에 성령님 사역의 본질이 드러나 있습니다. 성령님의 가장 큰 사명은 우리 개개인이 죄인됨과 구세주의 필요를 깨닫게 하심으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속죄의 모든 사역을 이룩하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게 하시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역은 제자들을 통해 성취하실 것입니다.그러므로 승천하시기 직전 성령님이 제자들에게 임하면 그들이 권능을 받고 증인이 될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성령님을 통해 제자들에게 약속된 권능은 군사력이 아니고, 로마의 식민지라는 멍에로부터 해방시킬 정치적 권력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땅 경계를 넘어 저 땅끝까지 예수님의 증인이 될 영적 권세였음을 알아야 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행 1:8-9).
오순절에 성령께서 마가의 다락방 120명의 신도들에게 강림하시자 유대인인 이들을 통하여 당시 천하만국에서 하나님께 경배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인 경건한 무리들은 복음의 사건을 그들의 언어로 듣게 되는 기적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러자 사도 베드로가 모인 무리들에게 요엘서 2:28-32절을 인용하여,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고 선포하였습니다.그러므로 오순절 사건은 본질적으로 선교적 사건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이 만민에게 즉, 남녀노소, 인종적 구별을 무론하고 부어질 것이라는 하나님의 옛 약속의 성취였습니다. 그리고 성령 충만한 120명의 그리스도인들이 말했던 최소한 15개 이상의 여러 다른 외국어들은 성령님에 의해 인간의 마음 가운데 자리 잡게 될 하나님 나라가 전 세계를 망라한다는 것에 대한 징조요 상징이었습니다. 사도행전은 가장 흥미진진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선교의 성령님이 선교하는 교회를 세워 그 교회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도록 세상 밖으로 내모는 것을 읽으면서 경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하나님은 선교의 하나님이시고 복음서의 그리스도는 선교의 그리스도이시며 사도행전의 성령은 선교의 성령이심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여러 사람들은 교회를 하나의 동아리 모임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둥그렇게 모여 앉아 서로 마주 보며 칭찬하고 지지합니다. 이런 생각에도 진리의 요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하고, 서로 권고해야 하며, 서로 격려하는 동시에 용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러운 것은 우리가 둥그렇게 모여 앉아 서로를 마주 볼 때, 세상을 향해서는 등을 돌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내부로만 성장한 교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밖으로 향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약성경의 스물한 개 서신들을 읽어 보면, 개인에게 쓰인 것조차도 교회를 세우기 위해 작성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사도들은 그리스도인의 신앙, 그리스도인의 예배, 그리스도인의 연합, 그리스도인의 거룩 같은 교회 내부 문제들에 대해 말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편지를 받을 교회가 세상 가운데 있다는 것을 철저하게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의 살아 있는 실현이었으며, 또한 좋은 소식을 주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좋은 예가 데살로니가전서 1장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2차 선교 여행 때 데살로니가를 방문하여 교회를 세웠지만, 이로 인하여 그 도시에 폭동이 일어나자 밤을 틈타 도시를 몰래 빠져나왔습니다.그리고 몇 주 후에 고린도에 도착했을 때 쓴 편지가 데살로니가전서입니다. 1장을 읽어보면 “우리의 복음이 너희에게도 이르렀다. 너희는 그것을 받았다. 그리고 너희는 그것을 널리 퍼뜨렸다”는 순서로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이와 같이 모든 교회는 복음을 위한 공명판이 되어야 합니다.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살전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