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독교의 소명으로서 ‘하나님은 우리를 자유의 자리로 부르신다’는 말씀을 두 번째로 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도록 부름받았다고 할 때, 그 의미는 그분의 노예와 종이 되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노예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의해야 하고, 더 나아가 신약성경에 의하면 이것이 진정한 자유라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5:1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합니다. 또 같은 장 13절은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라고 말합니다. 즉, 우리는 죄의식으로부터의 자유를 받은 것입니다. 이것은 다름 아닌 ‘자기 중심성’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데 ‘자기 중심성’을 말콤 머거리지는 “내 자아의 어둡고 작은 토굴 감옥”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도록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부름받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죽음심을 통하여 받은 자유를 가지고 육체의 기회를 삼는 일은 없도록 특히 주의해야만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웃 사랑을 가지고 서로 섬겨야만 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갈5:13).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독교 소명의 세 번째로, “하나님은 우리를 교제의 자리로 부르신다”는 말씀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교제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아니라 지체들 간의 교제를 뜻합니다. 골로새서 3:15은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교제할 때 얻게 되는 이 평강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성경이 말하는 평강(peace, 그 유명한 히브리어 단어 ‘샬롬’)은 사회적 개념입니다. 이것은 호젓한 곳에서 나 혼자 즐기는 내적 평정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화해 그리고 서로와의 화해이기도 한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그리스도인과 같은 기괴한 변칙에 대하여 추호도 언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새 공동체에 속하도록 부르십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속하지 않고도 그리스도께 속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부름받고, 자유로 부름받고, 성도들 서로 간의 교제로 부름받는다는 사실을 명심하여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4:1-3).
기독교 소명의 네 번째는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함의 자리로 부르신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도로 부르심을 입습니다.”(롬1:7). 또는 고린도전서 1:2에서처럼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에 속하도록 부름받습니다. 성도는 어떤 것에 속하기 위해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표준과 새로운 가치 체계를 발전시키기 위하여 세상의 표준과 가치 기준으로부터 구별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도가 되도록 부름받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부르심은 “거룩한 부르심”입니다.(딤후1:9).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니”(살전4:7)라고 바로 몇 달 전에 개척된 데살로니가의 교회에게 썼던 것입니다. 이 거룩함이란 단어는 다른 말로 그리스도를 닮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성품과 행위가 그리스도를 닮도록 부름받았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만 합니다. 사실 이렇게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목적을 위하여 우리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받았으며(엡1:4), 하나님은 모든 것들을 동원하여 우리가 거룩하게 되도록 일하시고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속하신 목적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28-29).
기독교 소명의 다섯 번째는 “하나님은 우리를 증거하는 자리로 부르신다”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인 된 우리 소명의 일부는, 그분의 놀라운 행위를 전 세계에 널리 전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이것은 과거의 우리와 현재의 우리 사이의 두두러진 대비입니다. 이 말씀과 같이 우리는 어두움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분의 기이한 빛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 아니었으며, 그분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분의 백성이며, 그분과 화해하였습니다. 이전에 우리는 그분의 진노 아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분의 자비 아래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진리들을 우리만 간직할 수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자신의 기이한 빛 가운데로 부르십니다. 그리하여 빛이 밝게 비취고 또 우리가 그분의 탁월하심을 전 세계에 널리 전파할 수 있게 하십니다. 또한 이런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늘로부터 성령님께서 보내심을 받으셨고, 지금 성령님께서는 교회의 주인으로서 세상에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원천이 되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도구로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리로 부름을 받고 있다는 것을 마음에 항상 간직하고 있어야 합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벧전3:15).
여섯 번째로 “하나님은 우리를 고난으로 부르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검은 박해의 구름이 몰려오고 있을 때인 AD64년경 베드로 전서를 기록했습니다. 당시 네로는 기독교 교회를 박해한 인물로 유명한 로마 황제로서 베드로와 바울 이 두 분이 네로 당시 순교당하셨습니다. 베드로 전서 2장 20절은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지은 죄가 있어 매를 맞을 경우에는 아무런 공로도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도 참는 경우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고난으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발자취를 좇아야 합니다. 우리는 고난을 받으며 그 고난을 참도록 부름받았습니다. 고난이 우리가 받은 소명의 일부분이라는 것은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놀라움과 충격을 줍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입니다. 고난받는 것은 기독교적 소명의 일부분이고, 언제나 그래 왔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고난에 대해 경고하셨으며, 사도들도 고난에 대해 경고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오늘날에도 변함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을 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비난과 비방의 대상이 된다면 그리스도를 위한 특권으로 생각하는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