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4 – 18
성령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만드시는 좋은 방법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분과 닮게 되고, 사랑하는 것을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좋은 예로서 이번 주일 설교에 언급한 크리스웰 목사님의 목회 경험담을 들 수 있습니다. 크리스웰 목사님은 달라스 first Baptist church(제일침례교회) 에서 오랜 동안 목회를 하셨습니다. 어느날 이 분이 궁궐같이 호화로운 집을 가진 집사님의 집을 방문 하였습니다. 그 집사님의 집 서재에서 어떤 그림 앞에 이르렀을 때 그 집사님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저분은 내 어머니입니다. 어머니께서 내 아주 어린 시절 돌아가셔서 나는 결코 그분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내가 하늘나라에 갔을 때 주님을 먼저 뵈옵고 나서 제일 먼저 내 어머니의 얼굴을 보러 가기를 원합니다.” 이때 크리스웰 목사님은 회고하기를, “저것이 당신의 어머니입니까? 저것은 단지 종이와 잉크로 그려진 그림일 뿐입니다.”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고 합니다. 물론 그 그림은 그 집사님의 어머니를 상징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어느 날인가는 천국에 갔을 때 그 어머니의 얼굴을 직접보고 함께 사랑하는 삶을 살 수 있다고 꿈꾸며 고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집사님이 자신에게 생명을 주신 어머니를 그리워 하고 감사하듯이 정확히 우리가 주님에게 대한 것도 같은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단지 성경에 기록된 사도들의 증언을 믿고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하시고 다시 오실 주님을 사랑하며 고대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본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보내주신 성령님과의 교제를 실제로 나누면서, 언젠가는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한 표상을 우리는 마음에 그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 아버지께 구하여야만 합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7:7-8) .
은혜의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창조의 빛을 비추신 덕분에 우리 모두는 “수건을 벗은 얼굴” (고후3:18)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얼굴을 가렸던 모세와 같지 않고, 마음에 수건을 쓴 유대인 불신자들과 같지 않으며, 사탄에게 생각이 가려진 이방인 불신자들과 같지 않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이 되었습니다. 마음의 눈가리개가 벗겨지고 눈의 비늘이 떨어져나가 예수님을 본 것이야말로 유대인과 이방인, 흑인과 백인,젊은이와 노인, 배운 자와 못 배운 자 할 것 없이 하나님의 모든 백성이 지닌 공통된 특징입니다. 우리는 얼굴의 수건을 벗고 눈을 떠서 주님의 영광을 바라봅니다. 시내산에서는 한 사람 모세만이 주 여호와의 영광을 보았지만 지금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이 주 예수님의 영광을 봅니다. 그러나 주님의 영광을 얼굴과 얼굴을 마주대하고 보기 위해서는 주님의 재림 때까지 기다려야만 합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아무리 “수건을 벗은 얼굴로” 볼지라도 어차피 그분을 “거울로 보는 것 같이”볼 수 밖에 없습니다. 사실 주님이 세상에 사실 때 우리는 살아 있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역사의 예수를 들여다보는 ‘거울’은 신약성경입니다. 사도들이 증언한 그분의 모습은 신약성경 안에 결정적으로 영원히 보존되어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숙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배운 그리스도의 모습이 우리에게 성령님의 능력으로 구현될 수 있게 하나님 아버지께 구하여야만 합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7:11-12).
그렇다면 신약성경 안에 결정적으로 영원히 보존된 예수님은 과연 어떤 분입니까? 즉 신약의 사도들이 증언한 예수님, 지금 우리의 눈앞에 경이롭게 드러난 영광의 예수님, 우리의 모범으로 제시된 예수님, 장차 우리가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그와 같이” 될 그분은 누구입니까?여기서는 그분의 모습을 4가지로 간략하게 그려 보고자 합니다. 첫째, 우리의 모본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낮추신” 분입니다. 즉 그분은 자신의 왕위를 비우고 자기를 낮추어 섬기셨습니다. 그분은 영원한 신성이라는 자신의 특전을 움켜쥐지 않으셨고, 하늘의 위엄을 등지고 자신의 신분과 특권을 버리셨습니다. 사도들은 성육신을 통해 나타난 예수님의 겸손하고 관대하신 모습을 다음과 같이 힘써 강조하면서 그것을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습으로 제시하였습니다. “우리는 마땅히…….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 하셨나니”(롬15:1,5). “오직 너희는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8:7,9). 이것이 바로 신약성경이라는 거울을 통해 우리가 볼 수 있는 예수님의 첫번째 모습입니다. 오늘 이 주님을 마음에 그리시면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2:5-8).
신약성경 안에 결정적으로 영원히 보존된 그리스도의 두 번째 모습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섬기신 분입니다. 자기를 낮추되 남을 섬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공허한 몸짓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자기를 낮추어 섬기셨고, 자신이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않고 도리어 섬기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막10:45). 과연 그분은 아찔할 정도로 가지각색인 인간의 곤경 앞에 한결같이 긍휼을 베풀며 섬기셨습니다. 그분은 굶주린 사람들을 먹이셨고, 병든 사람들을 고치셨으며, 슬픈 사람들을 위로하셨고, 소외된 사람들의 친구가 되셨고, 죄인들을 용서하셨고, 죽은 사람들을 살리셨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그분은 종의 앞치마를 두르고 제자들의 발까지 씻어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으니라”(요13:14-15). 이제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에 보냄받으신 것처럼 우리를 세상에 보내시되(요20:21) 자신처럼 증언하고 섬기며 인간의 곤경 앞에 자상하게 긍휼을 베풀라고 보내시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사명을 이루게 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백성들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그리스도의 섬김을 이루어나가야만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갈5:24-26).
우리가 신약성경에서 볼 수 있는 세 번째 그리스도의 모습은 원수를 사랑하신 모범입니다. 이 모습은 우리가 반드시 본받아야만 하는 모습으로 세상 사람들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아예 복수를 꾀하지도 말며, 오히려 원수를 사랑하고 자기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며 자기를 해하려는 자들을 선대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물론 주님은 그 가르침대로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위에서 자기를 못 박고 조롱하는 로마군병들, 유대인들에 대하여 주님은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라고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그런 주님을 생각하면서 베드로는 나중에 이렇게 썼습니다.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벧전2:20-23). 또한 사도 바울 역시 같은 가르침을 주고 있는 바 이는 주님의 가르침과 모범에 그 근원이 있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롬12:1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