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과 최초의 회심과 지속적인 성화와 최후의 영화 가운데 무엇을 생각하든 부각되는 주제는 동일합니다. 각 단계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음’ 혹은 그분의 ‘형상’이 언급됩니다. 완성된 구원이란 바로 그분과 같아지는 것입니다. 지혜는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들려올 때가 많은데 , 이 내용도 아이들의 노래 속에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예수님처럼, 예수님처럼 되고 싶어요. 사랑하는 나의 예수님 나 날마다 예수님처럼 그렇게 자라고 싶어요.” 이렇게 그리스도를 닮는 일은 중요한데, 그것은 그리스도를 닮는 모습은 하나님이 그 백성에게서 보기 원하시는 바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닮는 모습은 또한 이를 지켜보는 세상이 보기 원하는 바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의 입술에는 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말하고 그분을 노래하고 그분께 기도하고 그분을 증거합니다. 따라서 세상은 그토록 우리의 입을 떠나지 않는 예수님을 우리 안에서 볼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주장과 행위 사이의 괴리, 우리가 말로 선포하는 그리스도와 행동으로 보이는 그리스도 사이의 널따란 간격만큼 기독교의 증언을 방해하는 것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말보다 먼저 우리의 삶으로 그리스도를 보여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요일 3:18-19).

미국의 감리교 선교사였던 고 스탠리 존스 박사는 다음과 같은 일을 겪었다고 합니다.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박사의 형제인 인도의 원로 철학자 바라 다다는 통찰력이 뛰어나면서도 성품이 온화한 사람”인데 한번은 그가 스탠리 존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는 이상적이고 훌륭하지만 당신네 그리스도인들은 그분을 닮지 않았군요.” 또 한번은 교육학 분야의 어느 힌두교 연사가 인도 남부에서 교육학자들을 대상으로 강연하던 중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중에 그리스도인들이 상당수 있을 줄로 압니다. 종교에 대한 강의는 아닙니다만 잠시 시간을 내서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처럼 된다면 인도는 내일 당장 여러분 앞에 무릎을 꿇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따른다고 고백하는 사람들과 그러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 차이가 명명백백하게 나타나야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끌리는 것이고 그렇지 못할 때 그들은 반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이 불리는 곳마다 사람들은 그분을 보기 원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그분을 닮고 본받을 책임이 있습니다.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25-27).

수넨스 추기경은 뉴욕에서의 한 강연에서 이런 말을 강조했습니다.

“알게 모르게 사람들이 교회에 기대하는 것은 오늘날 교회가 그들에게 복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지금 현재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만나기 원합니다. 그들은 자기 눈으로 그분을 보고 자기 손으로 그분을 만지기 원합니다. 어느 날 빌립을 찾아 왔던 순례자들처럼 그들도 우리에게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대면하여 만나기를 원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당면하고 있는 도전은 그들이 우리 각자에게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보자고 요구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햇빛을 투과시키는 유리판처럼 우리가 그리스도를 선명히 반사하기를 원합니다. 우리 안에 불투명하고 때 묻은 부분이 있다면 그 때문에 그리스도 의 얼굴이 일그러집니다. 불신자들이 우리를 비난하는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어서가 아니라 충분히 그리스도인답지 못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인다워야 할 우리가 그렇지 못한 것이야말로 정말 비극입니다.”

실상 그리스도의 이름이 불리는 곳마다 사람들은 그분을 보기 원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그분을 닮고 본받을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3:17-18).

우리는 하나님의 목표 때문에 그리고 세상의 기대 때문에 마땅히 그리스도를 닮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가 어떻게 그 분처럼 자라 가도록 되어 있는지 성경을 통해 배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여기 바울이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3:18). 이 말씀에서 곧바로 눈에 띄는것은 ‘주’와 ‘주의 영’ 즉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2위와 제3위가 나란히 언급 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사실 이 말씀은 성령의 사역을 성자의 인격과 연결하고 있습니다. 그런 문맥에서 해석할 때 본문은 성령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두가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에게 그리스도 영광을 보이시는 일이고, 또 하나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키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복음이 가려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과 생각을 가리는 수건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며 그것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즉 그들의 문제는 복음을 듣지 못한 무지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눈먼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눈을 덮은 수건이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 수건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의 성취이심을 보고 믿을 때에만 없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수건의 가림, 즉 영적으로 눈먼 상태애서의 해방은 그리스도를 증거하시는 성령님의 비취심을 받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고후3:15-17).

유대인 불신자들이건 이방인 불신자들이건 똑같이 가려진 눈은 불신의 씨앗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그중에 이 세상의 신(곧 마귀)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4:3-4). 이것은 엄숙한 말씀입니다. 바울은 눈이 멀어 망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복음을 가리기 때문이 아니라 마귀가 그들의 마음을 가려 복음을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임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더욱 긴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기쁜 소식을 담대히 선포하면 하나님이 “빛이 비치라”는 창조의 명령을 발하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때에만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어두워진 인간의 마음에 비쳐들 수 있는 것입니다. 은혜의 하나님이 이렇게 주도적으로 창조의 빛을 비추신 덕분에 우리 모두는 “수건을 벗은 얼굴”(고후3:18)이 되어 주의 영광을 보고 주의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게 된 것은 전부 성령님 덕분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5: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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