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젠도르프 백작은 열아홉 살 때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졸업하였습니다. 18세기의 모든 귀족들이 그랬듯이 대학을 갓 졸업한 그도 바깥세상으로 나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뒤셀도르프에 있는 어느 화랑에 갔다가 17세기 초의 이탈리아 화가 도메니코 페티가 예수 그리스도를 그린 그림에 마음이 사로잡혔습니다. 그것은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라는 작품으로, 빌라도가 예수님을 채찍질한 후에 무리 앞에 도로 내놓는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예수님은 자주색 옷을 걸치고 가시 면류관을 쓰고 밧줄에 묶여 있습니다. 진젠도르프는 그 앞에 서서 꼼짝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시선이 그의 심장을 꿰뚫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림의 위아래에 라틴어로 쓰인 그리스도의 말씀은 꼭 그에게 직접 하시는 말씀 같았습니다. “내 너를 위하여 이렇게 했거늘 너 나를 위하여 무엇하고 있느냐?” A.J. 루이스는 이렇게 썼습니다. “그날 거기서 젊은 백작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께 자신도 ‘그 고난에 동참하게 해달라고’, 평생 그분을 섬기며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목표는 결국 예수님을 증거하고 우리가 그분의 제자인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일찍이 진젠도르프 그리고 지난 세월 수많은 예배자들이 그러했듯이 2019년을 맞이하는 우리 역시 이 그림 앞에 서서, 주님이 우리에게 큰 사랑을 베푸셨으니 우리도 주님을 위해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여야만 할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빌3:10-12).
이제 새해가 되었습니다. 새해에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아가야만 하겠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에 관한 주제는 15세기 초에 간행된 토마스 아 켐피스의 영성 고전 《그리스도를 본받아 The Imitation of Christ》 덕분에 지난 500년 동안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에게 한결 친숙해졌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음에 관하여’라는 제목이 붙은 그 책의 첫 장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주님은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한다’고 말씀하신다. 이는 우리가 정말 빛을 얻어 마음의 모든 눈먼 것에서 자유하려면 그분의 형상을 우리의 삶과 성품의 틀로 삼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묵상하려 애써야 한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그분을 닮으려 하기 전에 먼저 그분을 묵상하라고 말합니다. 그분의 독특한 생애를 묵상하는 사람은 그분과 우리 사이의 거대한 간격, 완전함과 죄의 간격을 보게 됩니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뜻에 일편단심으로 헌신하신 그분을 생각해보게 되면, 아무것도 그분을 딴 길로 돌려놓을 수 없었고, 십자가에서 고통당하고 버림받으신 일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 반면에 한 없이 떠도는우리의 방황, 고집, 나약하고 맥없는 타협을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분의 강인한 자제력과 궁핍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자상한 마음을 생각해 보고,우리 자신은 다른 사람들의 약점에는 냉혹하고 나 자신의 약점에는 관대한 모습을 보인다는 사실 역시 생각한다면 어떻게 우리가 그분을 닮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에게는 포기하거나 절망할 자유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구원받은 본래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살전1:6-7).
실상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은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보기 원하시는 바입니다. 인생이란 무엇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왜 이 세상에 오셔서 사시고 죽으신 후 부활하셨으며, 하나님은 기나긴 역사를 통해 하시려는 일이 무엇인지를 짤막하게 한 문장으로 압축해야 한다면, 이보다 더 명징한 설명은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시려고 그리스도를 닮게 하시는 중입니다. 애초에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셨지만 우리가 불순종으로 그것을 더럽히고 왜곡하였습니다. 지금 그분은 그것을 회복하느라 바쁘시며, 그 회복이란 곧 우리로 그리스도를 닮게 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이자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인 까닭입니다(참고 골1:15; 고후4:4). 하나님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이것을 계획하셨고 이를 이루시기 위하여 우리를 선택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하는 문제에서도 동일한 계획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시작을 흔히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회심(죄를 등지고 그리스도께로 돌아섬),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중생(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새 생명을 주시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체험의 근본적인 특성과 목적을 에베소서에서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4).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3:9-10).
그리스도인의 삶을 지속하는 영역에서도 그 특성과 목표는 본질상 시작과 동일합니다. 그것은 갓난이기가 성장하고 꽃눈이 활짝 피어나고 씨앗이 결실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하게 자라가는 과정을 우리는 흔히 성화라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을 빼면 무엇이 거룩함이란 말입니까? 우리는“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사는”(요일2:6) 법을 배워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가 흔히 천국이라는 부르는 최후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사도들은 우리가 천국에 대해 아는 바가 많지 않다고 말합니다. 최후의 영광은 우리의 이해를 훌쩍 넘어섭니다. “우리가 ….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최후에 영광을 얻은 우리가 어떠할지 아직 자세히 모를지라도 우리가 아는 것이 있습니다.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은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라고 요한은 말하고 있습니다(요일3:2). 바울도 비슷하게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15:49)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전체적인 목표는 하나님이 우리로 그리스도를 닮게 하려 하신다는 한 가지 개념으로 압축할 수 있는 것으로. 과거의 영원 속에 태동되어, 역사 속에서 그분의 백성을 위해 그들 안에 이루어져왔고, 장차 올 영광 중에 완성될 것입니다. “(왜냐하면)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