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2. 10 – 14
우리는 주인이신 그리스도의 권위 ‘아래’있고, 그분의 가르침이라는 견고한 기초 ‘위에’ 우리의 삶을 세워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순종의 이론적 근거를 이해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순종을 명하시는 분의 독특성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순종은 그리스도를 ‘위한’ 것입니다. 어부 시절의 시몬 베드로가 좋은 예입니다. 갈릴리 호숫가에 뿌옇게 먼동이 틀 무렵이었을 것입니다. 호수에서 어부로동업하던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밤새 고기를 하나도 잡지 못한 채 호반에서 맥없이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시몬의 배를 빌려 띄우고 그것을 강단으로 삼아 사람들을 가르치신 후에 시몬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이르셨습니다. 시몬은 밤새 노력했지만 잡지 못하였다고 항변하였는데 이는 어부로서 아버지에게 배우고 고된 경험으로 다져온 전문 지식으로 그분의 제안에 저항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명하신 분은 다른 동료가 아닌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예수님이셨습니다. 베드로의 순종의 결과로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혀 다른 배를 불러야 했고, 결국 두 배 모두 고기의 무게로 가라앉기 직전이 되었습니다(눅5:1-11).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순종이 다른 모든 순종과 어떻게 차이가 나겠습니까? “그(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롬1:5-6)”
그리스도인의 순종은 다른 모든 순종과 다릅니다. 그것은 노예나 군인의 순종이 아니라 본질상 사랑의 순종, 즉 명령하신 분을 알고 신뢰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순종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순종을 요구하시면서 그것을 설명하시고 정당화하시는 방식을 요한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요 14:15, 21, 23). 예수님은 우리의 전 존재를 다해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는 것이 구약성경의 명령임을 익히 아시면서도 제자들이 자신에게 최고의 사랑을 바치기를 바라십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그 사랑을 어떻게 표현하기를 원하시는지도 분명히 밝히십니다. 우리가 그분께 사랑을 표현하는 주된 방식은 그분의 계명을 “가지고”(즉 그분의 가르침에서 계명을 찾아 마음속에 간직하고), 그것을 지키는(순종하는) 것입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26-27)
예수님은 순종으로 사랑을 입증하는 제자에게 특별한 약속을 주십니다.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14:21). 또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요14:23). 이보다 풍성한 약속은 생각하기 힘들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아버지와 같이 와서 그들과 함께 거하며 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겠다고 약속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의 시험은 우리의 순종이요, 사랑의 보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계시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에 그리스도께 불순종하려는 깊은 유혹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그분이 명하시는 바가 우리의 마음에 들지 않아서일 수도 있고 왜 그런 것을 명하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더 잘 안다는 생각 때문일 수도 있고 명하신 내용이 시류에 맞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럴 때 우리는 순종의 배후 근거를 떠올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고 있고, 그분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그래서 싹텄습니다. 명하시는 분이 주님이시기에 우리는 ‘주님을 위해’ 기쁨으로 즉시 순종하는 것입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2:4-6).
오늘날 세계 도처의 교회에서 전도의 개념이 송두리째 관심 밖으로 밀려났기에, 또한 차마 예수 그리스도의 열렬한 증인이라 말할 수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대다수이기에, 우리는 선교의 동기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반드시 숙고해야 합니다. 우리가 친척들과 친구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려는 열망을 품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타문화권에 복음을 전하는 사신들은 다른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회심시키려는 자신의 노력을 어떤 근거로 정당화할 수 있겠습니까? 사도들이라면 이런 질문에 어려움이나 망설임 없이 답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선교는 ‘그리스도를 위해’ 수행하는 것입니다. 1885년부터 1906년까지 엑세터의 성공회 주교를 지낸 에드워드 비커스테스가 쓴 감동적인 선교의 찬송시에 그 의미가 잘 담겨 있습니다.
『나와 복음을 위하여 가서 구원의 이야기를 전하라/ 사신들은 주님께 대답했네 “아멘, 모든 영광 주님께!” 주 위하여 세상을 버리고 주의 탄생과 삶과 십자가 그 구속의 사랑과 부활, 왕위에 앉으심을 전하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고후5:20).
바울은 로마서 첫머리에서 자신은 이방인들이 믿어 순종하게 하고자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되 때 “그의 이름을 위하여” 받았다고 썼습니다(롬1:5). 사도 요한도 최초의 선교사들을 비슷한 말로 묘사하기를, 그들이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갔다고 썼습니다(요삼1:7). 모든 세대의 그리스도의 선교사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고국을 등지고 다른 문화에 동화하여 위험과 질병과 죽음을 감수했습니다. 그들의 근본적인 동기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합당한 대우를 받는 것이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대표적으로 홀 선교사 가문이 그렇습니다. 제임스 홀과 로제타 홀은 각기 의사로서 약혼한 사이였으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때문에 로제타 홀은 아무런 결혼의 기약없이 조선에 먼저 왔습니다. 그때가 1890년 10월이었습니다. 그리고 도착 후 곧 바로 진료를 시작하여 1933년 조선을 떠날 때까지 무려 43년간 조선을 위해 일했습니다. 남편 제임스 홀은 약혼녀를 만나 함께 선교하기 위해 조선에 오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아무 소용도 없을 무렵 그야말로 하나님의 은혜로 1893년 조선 땅을 밟아 오직 1년 여만을 함께 부인과 일하고는 열병에 걸려 서울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들 부부 사이에 아들과 딸을 두었지만 딸 이디스 역시 3살 때 평양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성장하여 의사가 되었고 한국에 최초로 결핵요양소를 지은 셔우드 홀 박사였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주님을 위해 조선을 섬겼던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3: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