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2. 3 – 7
흔히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위해’라는 단어는 그리스어의 세 가지 서로 다른 말을 옮긴 것이지만 의미는 같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한 일은 말 그대로 그분을 위해 한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려는 동일한 열망은 우리의 기도만이 아니라 행동에도 감화를 끼치게 됩니다. 조지 허버트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범사에 주와 더불어 하면 천한 일이란 없습니다. ‘주를 위해’ 그 한마디에 모두 밝고 깨끗해집니다.” 이 말은 어떤 행동이든 ‘그리스도를 위해’ 하면 그 행동의 색조가 선명해지고 밝아진다는 뉘앙스를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행동보다 중요한 것이 의도입니다. 사실 행동의 선하고 악함, 친절하고 잔인함, 아름답고 추함을 결정짓는 것은 배후의 의도 즉 동기일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확실히 그렇게 평가하십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의 말과 행동을 넘어 이면에 숨은 생각과 동기를 보신다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무엇을 하는가보다 왜 하는가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는 어떤 동기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대하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시기고, 여기서도 우리는 그리스도를 본받아야만 합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동기는 대단히 중요한 주제입니다. 무엇을 하는가보다 왜 하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고 있습니다.그래서 생산성을 높이려는 기업가들은 봉급 인상, 특전 부여, 상여금 인상, 근무 조건 개선 등 늘 참신한 동기부여 유인을 찾아내려고 합니다. 범죄를 수사하는 형사들은 범인이 품었을 법한 동기를 곰곰히 따져 수사를 진행합니다. 정신과 의사들 역시 좋은 치료를 하기 위해 우리의 무의식적 충동을 탐색하여 원인을 찾아내려고 합니다. 인간의 동기를 여러 방식으로 정의할 수 있겠지만, 만인의 가장 공통된 동기는 ‘이기심’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타락한 죄인이며, ‘원죄’란 유전으로 물려받은 삐딱한 자기중심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타락한 인간을 ‘자기에게로 굽은 인간’이라고 표현한 루터의 말보다 더 적합한 말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망도 대부분 이기적인 야망입니다. 부나 명성이나 권력을 거머쥐어 ‘성공’하는 사람들은 주로 일신상의 출세라는 동기가 있습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이기적인 인간들 사이에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물론 없어졌고, 자기와 충돌하는 이웃에 대하여는 증오만이 남게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와 정반대로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것은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에 정확히 표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본받아 우리의 친구들뿐만 아니라 우리를 대적하는 사람들조차 품어줄 수 있어야만 합니다. 가히 세상을 품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입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롬12:17).
사람들의 중심 속에는 이기심이 존재하지만 사회에 이것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은 따가운 눈총을 받기 때문에 어떻게든 순화되거나 승화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라듐을 공동으로 발견하여 1903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피에르와 마리 퀴리는 암 치료제를 찾아내려는 일념으로 많은 실패와 오해를 견뎌냈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세상 최고의 동기인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일하는 것에 비하면 희미하게 빛을 잃고 맙니다. 그리스도인의 갈망은 무엇보다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고 그분의 이름에 명예와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5:14-15).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라는 확신에 찬 선언을 내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면 누구나 마땅히 그래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강권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하는 오늘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바울이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라고 말씀하실 때 이 ‘강권하다’라는 그리스도어 동사는 복음서 특히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을 에워싸는 무리(눅8:45), 예루살렘을 포위하여 “사면으로 가두는”로마 군대(눅19:43)를 묘사할 때 쓰였습니다. 또 누가는 의학적으로 열병이나 이질에, 감정적으로 두려움(눅8:37)이나 답답함(눅12:50)에 ‘붙들린’ 사람들에 대해서도 같은 단어를 썼습니다. 각 경우마다 육체적으로 또는 심리적으로 무언가 강한 눌림이 사람을 붙들어 지배하거나 강권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느낀 눌림은 그리스도의 큰 사랑이었으므로 그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는 “다른 여지를 주지 않는다”(NEB번역)는 뜻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인해 사면으로 갇히거나 심지어 ‘구석에 몰리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느낌을 사도 바울은 고린도 후서5:14-15에서 4가지 확신으로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확신이 전제되어 있으며 나머지 그 3가지 확신이 무엇인지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1)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2)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3)”(고후5:14-15).”
그리스도의 사랑에는 항거할 수 없는 논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라면 오늘 우리는 새 생명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생명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그분의 사랑에 전적으로 힘입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이유는 바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진리를 “우리가 생각(확신)”하기 때문입니다(고후5: 14절). 이제 와서 우리가 자신을 위해 산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그분께 새 생명을 빚진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당 그분을 위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가두어 다른 대안을 남기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야 하는 새로운 삶은 많은 형태를 띠고 있는데 그중에 주된 몇가지인 “그리스도를 위한 순종의 삶” “그리스도를 위한 선교의 삶”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의 삶” “십자가가 항상 보이는 자리에 있게되는 삶”을 먼저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다음 주에는 존 스토트 목사님이 생각하셨던 이 삶들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눅12:35 -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