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1.19 – 23
새뮤얼 채드윅이 구두를 닦는 일을 시작으로 가장 단순한 일들조차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하듯 하는 버릇이 들은 것과 마찬가지로 방을 치울 때도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우리 집에 오실 것처럼, 그분께 깔끔한 방을 내드리고 싶은 마음으로 할 수 있습니다. 찰스 스펄전(1834-1892) 목사님에 관한 실화 중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당시는 정식 교인이 되려고 신청하면 그 교회 목사를 비롯한 모든 집사 및 장로와 인터뷰를 가져야 했습니다. 이때 런던의 어느 커다란 집에서 하녀로 일하던 십대 소녀가 교인이 되겠다고 신청했습니다. 그녀가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자 스펄전 목사님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정말로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는 것을 무엇으로 증명하겠소?” 잔뜩 긴장해 있던 소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에는 먼지를 장판 밑으로 슬쩍 쓸어 넣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곧바로 “더 이상의 질문은 없습니다. 우리는 이 소녀를 받아들일 것입니다! 모두들 교제의 악수를 나누십시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방문할 때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기 사시는 것처럼, 편지를 쓸 때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읽으실 것처럼, 환자를 간호할 때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병상에 계신 것처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식사를 준비할 때도 우리는 마치 내가 부엌의 마르다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음식을 드실 것처럼 할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골3:23-24).
17세기 초의 시인이자 목사인 조지 허버트는 아주 멋스럽게 그리스도를 섬기듯이 모든 것을 하라는 뜻을 찬송가로 나타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왕이여, 범사에 주를 보게 하시고, 나 무슨 일을 하든지 주를 위해 하게 하소서/ 유리를 보는 자의 눈 유리에 머물 수도 있으나 원한다면 그 너머로 천국을 볼 수 있습니다/ 범사에 주와 더불어 하면 천한 일이란 없습니다. ‘주를 위해’ 그 한마디에 모두 밝고 깨끗해집니다./ 그 말씀대로 사는 종에게 허드렛일도 신성해지고 주 말씀을 위해서라면 청소도 즐거워집니다./ 무엇이든 금으로 바꾸는 신기한 돌이 여기 있으니 하나님이 손대시는 것마다 찬란한 빛을 발합니다./
이 찬송시를 묵상하시면서 오늘 하루 주님을 섬기듯이 모든 것을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시128편 1-2).
가정과 직장은 우리들 대부분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정과 일터보다 더 넓은 책임을 주십니다. 우리 중에 사회와 전혀 무관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나아가 어려움에 처한 바깥세상에 우리가 보여야 할 반응은 섬김이며, 지금까지 살펴본 동일한 원리가 우리 섬김의 길잡이가 되고 그 품위를 높여 줄 수 있습니다.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예수님의 가르침, 특히 양과 염소를 가르는 마태복음 25장 31절 이하의 이야기를 통해 그분이 묘사한 최후의 심판을 살펴보면 대단히 중요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어느날 ‘인자가’ 친히 천사들을 대동하고 영광 중에 오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왕과 심판자로 앉으실 것이고, 모든 민족들이 그분 앞에 모일 것입니다. 세계 역사의 모든 시대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이 집결될 것입니다. 그들의 부활은 언급되지 않았으나 가정되어 있습니다. 그때 그분은 마치 목자가 뒤섞인 가축 떼에서 양과 염소를 가르는 것처럼 사람들을 서로 갈라 의인들은 자신의 오른 편에 두고 불의한 자들은 왼편에 두실 것입니다. 그리고 의인들을 향해서는 ‘나아와’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라고 부르시고, 불의한 자들에게는 ‘떠나’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고 명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무슨 근거로 그런 결론을 내리시겠습니까? 제대로된 교리를 고백하지 않아서일까요? 아닙니다. 모두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무엇을 근거로 한 것인지 한 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약2:14).
마태복음 25장 31-46절의 본문이 근본적으로 가르치는 것은 심판자가 자신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근거로 심판을 행하시는데, 그것은 그분의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또는 가장 비천한) 자”를 향한 그들의 행동(또는 행동하지 않음)으로 나타납니다. 의인들은 그분이 배고플 때 먹이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하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고, 벗었을 때 입히고, 병원이나 옥에 있을 때 찾아가 보았습니다. 그분이 설명하신 대로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불의한 자들도 그리스도께서 배고프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고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힌 모습을 보았으나 어려움에 처한 그분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가장 비천한 형제 하나를 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행한 일이 아니라 행하지 않은 일, 즉 태만과 괘씸한 무관심 때문에 심판받을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여기 그리스도의 ‘형제들’이란 누구를 말하겠습니까? “어려움 속에 처한 그리스도인들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고, 이에 대해 그것은 너무나 좁은 범위이기 때문에 “고통받는 모든 인간이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쨌건 그 판단은 주님 손에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으면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인정받는다고(이신칭의:엡2:8-9)) 성경은 가르치고 있는데 어째서 마지막 날 심판 때에는 믿음이 아니라 행위를 보고 의인 여부를 판단하신 뒤 영벌과 영생의 근거를 삼으시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오늘 한 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약2:18).
신약성경 전체에서 가르치는 바는 이것입니다. 우리 죄인들이 얻는 ‘칭의 – 의롭다고 칭하심을 받음’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하나 ‘심판’은 우리의 믿음이 진정한 믿음이냐를 가늠하는 것이며 그것은 우리의 행위를 근거로 내려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는 결코 모순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선을 행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믿음이 공적으로 나타나는 유일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믿음은 마음속에 은밀히 숨어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진실이라면 그것은 선행을 통해 저절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약2:18,20)이라고 말했습니다. 심판 날은 공적인 사건이므로 반드시 공적인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긍휼의 행위로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친히 누차 그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예컨대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16:27). 행위를 근거로 삼는 것은 믿음의 진실성을 파악하기 위함입니다. 입술의 고백만으로는 충분치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도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주님의 뜻을 행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믿음과 사랑의 신비가 있는 것입니다. 결국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은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요14:2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