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0:28-31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펴낸 《대한제국의 미술 빛의 길을 꿈꾸다》라는 책을 보면 민영환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적고 있습니다. “1906년 7월 17일자 『대한매일신보』에는 양기훈의 ‘혈죽도’가 ’‘혈죽기’와 함게 게재됐다. 을사조약의 폐기와 을사오적의 처형을 주장했던 충정공 민영환(1861-1905)의 자결 후, 혈흔이 묻은 옷가지 아래에서는 네 줄기의 푸른 대나무가 솟아나 당시 이 녹죽을 보기 위한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한다. 민영환의 순국이 불러일으킨 항일의식과 대나무가 갖는 곧은 충절의 이미지가 겹쳐지면서, 이 대나무는 혈죽이라 명명됐고, 양기훈이 이를 묘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혈죽도’는 목판화 각판을 붙여 『대한매일신보』 제4면에 전면 인쇄됐으며 “충절을 애모하시는 독자들은 이 대나무 판화를 감상하며 칭송할 것이다” 라고 그림의 경위를 밝혀 놓았다. 그리고 현채(1856-1925)가 1907년 저술되고 1909년 일제에 의해 폐간된 초등학교 아동용 교과서 “유년필독”의 제3권에는 “민영환 혈죽도”가 혈죽, 민영환 유상과 함께 수록됐으며 “놀랍고도 신기하다. 우리 민충정. 어리석고 불쌍하다. 우리 국민들”이라는 글이 덧붙여졌습니다. 충정공 민영환은 오직 대한제국 혹은 조선만이 그의 인생의 전부여서 이 민족과 국가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더 이상없자 목숨을 버림으로 민족의 혼을 깨우쳤고, 여기에 조선의 땅이 부응을 하였는지 푸른 대나무가 솟아났습니다. 그러나 국가를 위해 살아도 영생을 얻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국가는 영생을 줄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살며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인생의 근본적인 질문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만 합니다. 이 질문을 던질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리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자신의 가족 혹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행복과 발전을 위해 산다는 답을 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다른 사람의 행복과 안녕에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매우 큽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마지막 고난 주간에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서 성전을 정화시키고 백성들을 가르치시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함께 와서 주님께 묻기를 “당신이 도대체 무슨 권위로 이런 일들을 하고 있느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나도 한 가지를 묻겠다. 요한의 침례가 하늘로서냐 아니면 사람으로부터냐?” 라고 하자 이들은 서로 의논하기를 만약 “하늘로부터다” 라고 하면, “왜 그를 믿지 않았느냐?”고 질타를 받을 것이요(요한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람으로부터다 라고 하면 백성이 침례 요한을 선지자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백성에게 돌을 맞을까 두렵다 그러니 슬쩍 이를 묻어두고 “어디로서인지 모른다”라고 하자고 합의를 한 뒤 주님께 와서 “어디로서인지 모르겠다”라고 하였습니다. 대제사장들 등은 전혀 진리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직 자신들의 이해관계만이 중요하였고, 자신들의 입장이 수치와 해를 당한다고 여겨지자 두려움의 노예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들의 삶의 기준은 하나님이나 성경의 진리가 아니라 철저히 자기 중심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살아서는 의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영생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영생을 얻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의 말씀이 적용되는 경우로써, 주님과 복음 혹은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하여 자신의 집, 형제, 자매, 부모, 자녀, 전토 등에 위험이 가해지는 어려운 경우를 당할 때입니다. 이때 과감하게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혹은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 혹은 하나님의 나라를 섬기기 위하여 이런 것들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은 반드시 영생을 상속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주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