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2018. 10.29 – 11.2

캔터베리 대주교를 지낸 고 마이클 램지는 서품식에서 ‘슬픔과 기쁨’이라는 제목으로 권면하면서 ‘주 안에서 기뻐함’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기뻐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나라이고 환경이며 숨쉬는 대기임을 아는 것입니다. 성 아우그스티누스는 ‘하나님은 우리 영혼의 나라’라고 했습니다. 그 나라에 사는 우리는 현재의 슬픈 상황에서 달아나지 않고(오히려 그런 슬픔에 더 민감해질 수 있겠지요) 하나님과 천국을 보는 영원의 시각으로 살아갑니다. 현재 우리들의 교회가 회의와 불안과 소극적인 태도와 무기력에 빠져 있는 것은 다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영혼의 나라인 하나님과 함께 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 나라에서 우리는 엄연히 문제에 부딪히지만 또한 성도의 기쁨에 동참합니다.” 한 마디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는 사도 바울의 권면과도 같은 내용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이룩하신 업적과 그분이 돌보신다는 약속을 믿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일꾼에게 구할 것은 충성입니다. 그러나 그 자세는 부득이함이 아니요 기쁨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서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 있기 때문입니다. 공기가 우리 공간에 있는지 여부는 손을 들어 휘들러 보면 알 수 있듯이, 주님께서 우리 중에 계시는 지의 여부는 그분의 뜻을 행함으로 충분히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

그리스도와 연합된 우리에게는 새로운 야망이 생깁니다. 우리가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아야” 함은(골3:1-2) 바로 그리스도와 함께 옛 생활에 죽고 새 생활에 다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위의 것’과 ‘아래의 것’,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의 구분을 흔히 오해합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땅의 책임을 무시하고 신비 체험을 좇도록 가르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우리에게 가정과 직장과 사회의 본분을 저버리고 일조의 종교적인 진공 상태에 빠지라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위의 것들’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곳에 속하는 것들입니다. 즉 그분의 의롭고 평화로운 통치와 공존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반대로 ‘땅의 것들’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던 우리의 옛 생활에 속한 것들입니다. 사도는 골로새서 3장 5절에 똑같이 ‘땅에 있는’이라는 표현을 되풀이한 뒤에 우리가 버려야 할 그것들을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정의했으므로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들 대신 우리는 ‘위의 것’ 즉 통치자이신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는 것들을 최고선으로 ‘찾아야’합니다. 우리는 일편단심 그것을 ‘생각하며’ 추구해야만 합니다. 이것은 다름아닌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는 예수님의 명령과 아주 흡사한 것이며 이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최고의 야망이어야 합니다. 그것도 먼 천상에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일상의 삶 속에서 실현되도록 하는 야망을 가져야만 합니다.“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그리스도와 연합된 우리에게는 새로운 기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아난 우리가 계속 옛날과 똑 같은 방식으로 옛날과 똑 같은 삶을 이어간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골로새서 3장 5절에 기록된 바와 같이 바울은 음란 곧 성적 부도덕을 지목하여 그 점을 예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유일한 죄나 가장 악한 죄이기 때문이 아니고 그리스도인들이 섹스에 병적으로 집착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다만 음란이야말로 ‘탐심 곧 우상숭배’의 뚜렷한 예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탐심’임은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켜 자신의 만족을 구하기 때문이요, 그것이 ‘우상숭배’임은 하나님을 보좌에서 몰아내는 오만한 욕심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엄중하게 선언하기를 그런 탐심과 우상숭배에 자신을 내어주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골로새 사람들도 한때 그 가운데 살았다고 덧붙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들에게는 새로운 기준이 있습니다. 탐심 대신 절제가, 우상숭배 대신 섬김이 있습니다.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골3:9-10).

셋째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새로운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은 음란한 생활이라는 탐심과 우상숭배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더러운 옷과 같은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을 “거짓말”과 함께 모두 “벗어버려야”합니다(골3:8-9). 대신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깨끗한 새 옷으로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서로 용납하고 용서해야 하며, “이 모든 것 위에” 가장 밝고 멋진 옷인 “사랑을 더애야” 합니다. 사랑은 “온전하게 매는 띠”이기 때문입니다(골3:12-14). 이렇게 완전히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 이유는 명백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우리의 새로운 삶은 새로운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인종과 계층의 낡은 장벽은 이제 무너졌습니다.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골3:11).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는 새로운 삶은 바로 새로운 야망, 새로운 기준, 새로운 관계가 그 안에 있고, 이 새로움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데서 비롯됩니다. 바울은 여기서 기독교 윤리의 기초를 놓고 있습니다. 그것은 신학적인 기초이니, 곧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 능력의 부활, 숨은 승천, 승리의 재림 속에 ‘그분과 함께’ 있다는 엄청난 진리입니다. 새로운 야망(그리스도의 의로운 통치를 구함), 새로운 기준(절제와 섬김과 경건), 새로운 관계(새로운 공동체 안에서 입는 겸손과 사랑)를 가꾸려면 우리는 자신의 정체를 잊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고,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와 함께 숨겨져 있으며,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의 핵심은 이렇게 구속 사역의 각 단계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보다 큰 능력으로 우리를 변화시킬 진리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붙잡으면, 과거와 현재 사이의 뛰어넘을 수 없는 단절이 더욱 극명해집니다. 우리는 뒤로 후퇴할 수도 없고 그 자리에 정체해 있을 수도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와 함께’ 전진해야 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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