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0. 22 – 26
다시 존 스토트 목사님의 책 “내 삶의 주인이신 그리스도” 로 돌아와서 ‘그리스도의 연합’의 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첫 번째는 이미 기술한 바대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둘째는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옛 생활에 죽었을 뿐 아니라 새 생활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죄와 죄책과 속박이라는 옛 생활이 끝났을 뿐 아니라 용서와 능력과 자유라는 새 생활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죽음뿐 아니라 부활에서도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지닌 큰 열망은 갈수록 더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몸으로 부활하신 일은 자연적인 부패의 과정을 묶어버렸을 뿐 아니라 초월하신 것입니다. 신약성경은 그분의 부활을 역사 속에 하나님의 능력이 표출된 정점으로 그립니다. 부활은 우주의 창조에 비견됩니다. 사실 그것은 새로운 창조 행위이기 때문입니다(참고, 엡1:19이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표출된 하나님의 능력은 또한 우리를 소외와 속박의 죽음에서 살리심으로 표출되었고, 악을 우리의 발아래 두심으로 오늘 우리의 삶에도 표출될 수 있는 것입니다(엡1:19 – 2:10).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4:25).
‘그리스도와 연합’의 세번째 의미로는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죽었다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 올라 우주적인 권위를 상징하는 위치인 하나님의 오른편에 좌정하셨습니다. 그분의 백성들은 구원 사역의 이 세 번째 사건에도 동참하였습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신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하늘에 앉히셨고”(엡2:6), 그래서 지금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골3:3).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숨은 삶이 있습니다. 그들은 보이게 이 땅에 살지만 보이지 않게 하늘에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멸시와 핍박과 박대를 당하고 심지어 패배하여 짓밟히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이 땅에 계실 때 숨은 삶을 누리셨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거나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분의 신적인 영광은 간혹 기적을 통해 터져 나왔지만 대개는 가려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수수께끼였고 불가해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사람은 목수가 아닌가?” 라며 어리둥절해했고, 그분의 언행에 담긴 권세와 인간적으로 초라한 배경을 서로 조화시키지 못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분의 정체는 사람들을 비켜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지 않고 그들이 그분을 이해하였다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을”것입니다(고전2:8).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는 더 꼭꼭 숨어 계심으로, 일각에서는 서슴없이 그분의 존재를 부인할 정도로 철저히 비가시적인 존재이십니다. 이와 같이 그분의 제자들에게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숨은 삶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3:3-4).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만나서 용서받기 전이나 그후나 겉보기에는 똑 같은 사람입니다. 우리의 여권이나 국적이나 가정도 똑같고, 부모와 배우자와 자녀들과 형제자매와 친척들과 친구들도 그대로입니다. 피부와 머리칼과 눈동자 색도 똑같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키가 크거나 작고, 말랐거나 뚱뚱하고, 잘생겼거나 평범하며, 기본적인 기질도 동일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새사람이며 전혀 새로운 존재입니다!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에 뭔가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가정에 수용되고 입양된 그분의 자녀인 까닭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새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을 받았으며, 이 생명은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물론 정말 새 생명이 있을진대 그것은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겸손하고도 당당히 나아가는 새로운 자세로, 역경의 폭풍 속에서 누리는 새로운 평온함으로, 미흡하나마 자신을 통제하는 새로운 모습으로, 어떤 식으로든 빼앗기고 상처받은 사람들을 향한 새로운 사랑과 긍휼로, 그럼에도 이런 것들은 생명의 외적인 표징일 뿐 생명 자체는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숨어 계신 그리스도와 함께 숨은 삶을 누립니다. 그분 자신이 “우리의 생명”이십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비밀이신 그리스도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그리스도와 연합의 네번째 의미는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나타날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다스리시는 예수님은 어느 날 다시 오십니다. 숨어계신 그분이 나타나십니다. 나아가 그분의 재림은 초림과 사뭇 다를 것입니다. 동일한 예수님이고 동일한 성육하신 영원한 성자이며 동일한 유일무이한 신인(神人)이지만, 그때는 낮고 겸손하게 오신 그분이 이제는 위풍당당하게 다시 오실 것입니다. 처음에는 정체가 드러나지 않게 오셨고 그 결과 많은 사람들에게 거부당하셨습니다. 그러나 다시 오실 때는 그분의 정체가 밝히 드러날 것이며 세상 모든 곳에서 그분을 알아보고 기뻐하거나 두려움에 낙망할 것입니다. 그렇게 그분이 나타나실 때 우리도 “그와 함께” 나타날 것입니다. 드디어 우리의 비밀이 알려지고, 우리의 정체가 드러나고, 우리의 숨은 삶이 밝혀질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참 모습으로, 즉 하나님의 순전한 자비로 구속받은 그분의 자녀로 알려질 것입니다. 우리는 또 그분의 영광을 볼 것이며,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는 깊은 의미에서 그 영광에 동참할 것입니다. “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1:6-9).
지금까지 그리스도와 연합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연합하여 그분의 백성으로서 그분과 하나 된 우리는 과거에 그분과 함께 죽었고, 다시 살아났고, 현재의 삶은 그분과 함께 숨어 있으며, 미래 어느날에 그분과 함께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재림은 역사 속의 사건 훨씬 이상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고 한 신약성경 말씀의 핵심적인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통치와 재림에 동참한다는 말에는 위험이 따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그리스도인들의 현실 도피를 정당화하는 구실로라면 몰라도, 실생활에는 전혀 쓸모없는 신화적 난세스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고, 우리도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이 일상생활에 미치는 의미를 추출하기 위해 그의 서신서 도처에서 그리스도인의 체험에 관한 깊은 신학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글이 로마서 6장입니다. 여기서 그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삶의 자세를 그리스도의 죽으심 및 부활과 연결하여 강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 6: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