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0. 8 – 12
선다 싱은 인도의 시크교 집안에 태어나 열다섯 살 때 환상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 회심했고, 그 사실을 즉시 가족들에게 알렸습니다. 그는 후에 “가족 중 일부는 내가 미쳤다고 했고 일부는 내가 꿈을 꾸었다고 했다. 그러나 나를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나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있지 않을 때 내가 겪었던 비참한 불안에 비하면 박해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바야흐로 환난과 박해가 시작되었지만 그것을 견디어 내는 것이 내게는 어렵지 않았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얼마 후 선다 싱은 집을 떠나 순회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1929년에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없이》라는 흥미로운 제목의 책을 펴냈는데, 취지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삶과 그리스도 없이 살아가는 삶의 차이를 보여주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책은 모두 6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장은 “그리스도 없는 불신자들” 2장은 “그리스도 있는 불신자들”은 침례는 받지 않았으나 ‘비밀리에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들을 말하고, 3장은 “그리스도 없는 그리스도인들”에 관한 것으로, “그리스도를 전혀 체험하지 않고도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는 사람들……. 그들은 속 빈 강정이요 영혼없는 몸과 같다”고 쓰고 있습니다. 4장은 “그리스도 있는 그리스도인들”에 관해 적으면서 자신의 경험과 믿음을 결론내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께서 자신 안에 계신 것과 없는 것의 차이를 한 마디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전도자 선다 싱은 다음과 같은 말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없이》라는 책의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없을 때 나는 물 밖의 물고기나 물속의 새 같았다. 그리스도와 함께 이제 나는 사랑의 바다에 있고, 세상에 살면서도 천국에 있다. 이 모든 것을 인해 그분께 영원히 찬송과 영광과 감사를 돌린다.” 그의 전도 일화를 보겠습니다. 선다 싱은 하드와르라는 도시에서 뾰족한 못들을 박은 침대 위에 누워서 고행을 하는 남자를 보고는 그에게 가서 물었습니다. “왜 당신은 이런 식으로 당신의 몸을 학대하고 상처를 주고 있습니까?” 그의 대답은 육신의 욕망을 죽이려고 고행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못들로 자신을 찌르는 아픔들은 내가 내 죄들과 악한 욕망들 때문에 받고 있는 고통에 비하면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닙니다. 내 목표는 내가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내 자아의 욕망을 짓누르는 것입니다” 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그는 18개월이나 누워 있었고, 그리고 이생의 짧은 기간에 목표 달성을 불가하고 여러 환생을 거쳐야 성취할 것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선다 싱은 그에게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은혜로 그가 원하는 것들을 받았고 평안과 자유함을 얻었다고 말하면서 그리스도를 영접할 것을 전도하였으나 그는 자신이 노력하여 획득하여야지 그런 엄청난 선물을 누가 거저 줄 수는 없다고 하면서 믿기를 거절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선물을 은혜로 주신 것을 믿습니까?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그리스도와 함께’라는 말의 의미를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의 몇 구절에서 아주 깊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2:20; 3:1-4). 이 본문은 바울이 이해하는 ‘그리스도와 함께’라는 개념이 “좁은 인생길에 주가 동행하시며 말씀하신다”는 유명한 찬송가처럼 그분과의 우정을 누리는 것 훨씬 이상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우정도 맞기는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는 것은 그분과 교제를 누리는 것 이상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분이 이루신 전체 구원 사역의 네 가지 주요 사건, 즉 죽음, 부활, 승천, 재림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처음 세 가지는 이미 경험해왔고, 마지막 하나는 언젠가 ‘그분과 함께’ 경험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행 1:9).
주님이 이루신 전체 구원 사역의 네 가지 주요 사건, 즉 죽음, 부활, 승천, 재림이 그리스도와 연합된 우리에게 어떻게 관련되는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처음 듣는 사람들에게 이 말은 약간 이상하게 들릴 것입니다(사실 그렇습니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갈2:20)라고 했고 또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십자가에 못 박혔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갈6:14). 이는 바울이 자신에 대하여 한 말이지만, 그는 믿고 침례를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롬6:3).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혼자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믿음(내적)과 침례(외적)를 통해 그분과 연합한 모든 사람들은 그분의 죽음에 동참했고 그분과 함께 죽었습니다.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무엇의 종말을 ‘죽음’에 빗대는 것보다 더 극적인 표현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소원과 희망과 꿈이 죽었다고 말하고 우정이나 결혼이 죽었다고 말합니다. 죽음은 최후이고 끝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을 믿기 전의 옛 생활이 끝났음을 강조하면서 우리가 그것에 대해 죽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이런 말이 실제로 우리 생활에 어떤 신학적 의미를 가지고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마 27:50-51)
이전에 우리는 죄, 자아, 두려움, 죄책, 보이지 않는 악의 세력에 예속된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과 소원한 사이였기 때문에 악의 세력이 우리를 노예로 삼았습니다. 그 시절에 우리는 간혹 이렇게 탄식하지 않았던가요? “내 죄와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서, 그리고 나를 지배하는 악의 세력에서 해방될 수만 있다면!” 많은 사람이 이런 탄식을 하였고, 존 스토트 목사님 역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존 스토트 목사님은 죄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정당한 값을 치르는 것뿐인데,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친히 값을 치러주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목사님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연합하면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고 그분의 죽음이 곧 우리의 죽음이 됨을, 그리하여 값을 치르고 빚을 청산하여 우리가 옛 생활의 굴레에서 해방됨을 배웠던 것입니다. 선다 싱 역시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다시 태어난 경험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다음 주에 그분의 체험에 대하여 이야기 할 것입니다만, 복음의 진리를 한마디로 요약하라고 한다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가 죄 사함을 받았다는 진리입니다.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눅 24:46-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