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0. 1-5
‘그리스도와 함께’ 이 말은 즉시 장례식과 묘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빌1:23)는 말씀이 비문으로 가장 많이 쓰이며, 때로 그것을 ‘그리스도와 함께’로 줄여서 쓰기 때문입니다. 2세기전 사셨다가 지금은 주님과 함께 있는 리처드 백스터 목사님의 시를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 주님, 제가 죽은지 사는지는 제가 걱정할 바 아니옵니다. 주를 사랑하고 섬기는 본분만 은혜로 저에게 허락하소서./ 제가 지날 죽음의 어두운 방 주님도 친히 지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나아오는 자는 이 문으로 들어야만 합니다./ 제가 그 생을 잘 모르고 제 믿음의 눈이 침침하여도, 주께서 다 아시니 족하오며 주와 함께 있으리니 족합니다.”
사실 “그리스도와 함께” 라는 말은 현재 우리가 이해하고 경험하는 차원을 훌쩍 뛰어넘는 그분과의 친밀한 인격적 교류를 가리킵니다. 사실 그때 누릴 그분의 직접적인 임재에 비하면 지금 그분의 백성들 가운데 함께하시는 그분의 임재는 차라리 부재에 가깝습니다. 그 임재 안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영원한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닙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1:8-9).
우리는 하나님의 시계에 손댈 수 없으며 잠자코 그분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이 땅에서 우리의 본분에 더욱 충실히 힘써야 합니다. 거라사 광인이 그 본분을 간과했기에 예수님의 입에서 그토록 엄중한 말씀이 나온 것이 아닙니까? 전에 미쳐서 벌거숭이로 다니다가 이제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진” 이 남자는 예수님과 함께있기를 간구하였습니다. 그 청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는 온전해졌고 예수님은 그를 새 사람으로 바꾸어주셨습니다. 자연히 그는 자신을 구해주신 분과 막힘없고 방해 없는 교제를 누리고 싶었습니다. 그는 한때 자신이 떠돌아다니던 무덤이나 산으로 돌아갈 생각이 추호도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 있고 싶었습니다. 그런 그를 누가 탓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거부하며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참고 막5:1-20). 그에게는 회피해서는 안될 증언과 섬김의 책임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데가볼리 전역을 다니면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큰 일을 자신에게 행하셨는지 만나는 사람마다 증언하였습니다. 그 결과 1년 후 이 지역으로 예수님이 돌아오셨을 때 이방인의 큰 무리가 모여들었고, 많은 치유와 동시에 보리떡 7개와 약간의 물고기로 남자만 4천명을 먹이시고 7 광주리를 남기시는 이적을 베푸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벧전1:13).
‘도암의 성자’로 알려진 이세종이란 분이 1930-40년대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천태산 골짜기에 은둔해서 수도생활을 하며 성경에 철저하였으며, 부부관계를 비록하여 모든 물질적인 방면에서 극도로 절제된 삶을 살아갔습니다. 자기 재산 일체를 처분하여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고, 독신을 지키는 것이 좋다는 성경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하여 16세 연하의 부인과의 성생활을 중단하였습니다. 이런 생활을 견디다 못한 부인은 두 번이나 가출하였습니다. 결국 신사참배 지시가 전국에 하달되자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버렸습니다. 우리가 추앙할 점도 많으나 이분은 가정을 가진 사람으로서 균형을 잃어버렸습니다. 만약 거라사 광인이 예수님의 명령을 준행하지 않고 그대로 예수님과 함께 있으려고만 하였다면 그는 간절히 “예수님과 함께” 있고 싶어 하는 그분의 수많은 다른 제자들, 즉 경건주의와 회피주의 그리스도인들의 선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구원의 단계들을 단축하여 곧장 천국으로 직행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이해가 되지만 질책을 받을 일입니다. 영원히 평화로운 천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기 전에 우리는 험하고 혼탁한 지상에서 본분을 다하며 지금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보는 것으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고린도 교회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삶이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이라서 혼인 서약이니 인종적 유산이니 사회적 지위 같은 회심하기 전의 연고 따위는 모두 버려도 된다고 생각한 성급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리스도는 사람들 사이의 교제를 막는 모든 장벽을 허무셨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 그러나 장벽이 철폐되었다고 해서 인간과 인간을 서로 구분하는 현실까지 그리된 것은 아닙니다. 물론 바울은 종들이 자유를 얻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래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할 경우 그가 준 지침은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고전7:24)는 것이었습니다. 회심하고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해서 반드시 우리의 사회적 현실과 상황이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과 함께’라는 말이 상황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의 관점으로 바꾸어버리기 때문에 모든 상황이 완전히 달리 보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비국교도라는 이유로 투옥되었던 17세기 스코틀랜드의 신학자 새뮤얼 러더포드는 유명한 옥중서신에서, “어젯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감방에 들어오셨다. 그러자 모든 돌들이 루비처럼 빛났다.”라고 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믿음과 소망의 눈을 가져야만 합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히11:3).
1936년에 페테르 야코블레비치 빈스는 러시아 감옥에서 가족들에게 편지를 보내, 주 예수께서 자신에게 힘을 수셔서 충성된 증인이 되도록 기도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분 없이 자유의 몸이 되는 것보다 감옥에서 그분과 함께 있는 것이 낫다”고 덧붙였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우리가 그분을 위해 어디를 가든 늘 우리와 함께하시겠다고 하신 부활하신 주님의 약속이 그대로 성취된 예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아직 피할 수 없는 책임이 남아 있기 때문에 아무 때나 불쑥 천국으로 갈 재량은 없습니다. 다만 ‘그리스도와 함께’ 그런 책임을 수행하면서 그 과정에서 지상 천국을 조금씩 맛볼 수는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변화산상의 놀라운 현상을 목격한 베드로와 같습니다. 주님과 고단한 선교여행을 하던 중 어느 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나를 무엇이라고 부르냐?” 하시니 베드로는 서슴지 않고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 후 6일 되는 날 주님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높은 산으로 오르셔서 밤 중에 기도하실 때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하셨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습니다. 이를 목격한 베드로는 그 높은 산 아무도 없는데서 초막을 짓고 살자고 말씀드렸습니다. 물론 베드로는 너무 두려워서 무슨 말을 하는지 자신도 모른 상황이었습니다만, 이와는 반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한 번 맛보면 거기에 주저할 것이 아니라, 힘을 얻고 산 밑으로 내려가 세상을 섬겨야만 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