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터예배

히브리서 11:1-6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가보면 선교사 캠벨 부인에 대한 기념비에는 “배화여학교, 종교교회, 자교교회의 설립자”로 기록이 되어 있다. 남감리회 소속 선교사 캠벨 부인은 44세인 1897년 한국에 들어와 선교를 시작한 후 1898년 고간동으로 선교부를 이전하자 여기서 여학생 6명으로 기숙학교를 시작했으며 점점 성장하여 1903년 학부의 인가를 받아 윤치호를 통해 “배화”란 이름을 받았는데 이것이 배화여학교이다. 이와 동시에 1900년 4월 15일 부활 주일을 기해 잣골교회를 시작했고 이어 1901년 가을 벽돌로 ‘루이스워커예배당’이 건축되었으며 교회는 계속 성장했다. 그러다가 1908년 4월 종침교 건너 도렴동에 새 예배당을 마련하고 나가면서 종교교회라고 불렀으나, 고간동에 그대로 남아 있던 교인도 상당수 있었다. 그래서 종침교 다리 아래로 나온 교인들은 ‘종교교회’를 만들었고, 남은 교인들은 여전히 고간동에서 ‘잣골교회’로 예배를 드렸다. 이렇게 일부 교인들이 옮겨가지 않고 ‘잣골교회’에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은 ‘계층간 문제’로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즉 종교교회로 나간 교인들 중에는 양반과 지식인이 많았고, 잣골교회에 남아 있던 교인들은 대부분 하류층 사람들이었다. 선교부에서도 1908년 연회부터 이 두 교회를 별개 교회로 인정해 주었다. 그러던 잣골교회는 1910년 어간에 통인과 내시들이 주로 살던 일종의 소외 계층 지역이었던 창성동의 작은 한옥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1912년 커다런 ‘내시 집’을 예배당으로 개조하여 사용하였다. 이때부터 ‘자교교회’라고 불리웠다.

한편, 남감리회 ‘선교100주년’ 기금 중 일부를 건축비로 얻어 1922년 5월 7일 40평 규모의 아담한 2층 벽돌 예배당을 봉헌하였다. 1928년 자교교회를 탐방한 <기독신보> 기자는 자교교회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 문명의 시설이 날로 점점 증가하여 가는 곳마다 소란하고 번화한 이 대경성에서도 북부 한 모퉁이 자하골이라면 아직도 그다지 번창하지 못하여 사람들이 보기에는 한적하고 쓸쓸한 늣김이 있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이러한 곳을 택하여 당신의 경륜을 나태내시려고 복음의 씨를 뿌리는 한 교당을 건설하셨으니 이는 곳 남감리 자교례배당이다. 이 례배당은 자슈궁다리 바로 아래 잇서 서편에 인왕산을 안대로 하고 엄연히 솟아있다” 이로써 자교교회는 자하문 아래 인왕산 골짜기 마을 ‘자하골’의 자수궁 다리, 즉 자수교 아래 자리 잡았다. 자하골에서 ‘자紫’, 자수궁 다리에서 ‘교橋’를 따서 자교교회란 이름이 생겨난 것이다. 종교교회가 종침다리에 위치하였듯, 자교교회도 자수궁 다리에 자리 잡은 것이다.

이렇게 3 단체의 설립자였던 캠벨 부인은 27세에 남편과 사별하여 혼자되었고 이어 두 딸도 병으로 잃어버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 헌신하여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생을 살기를 결심하고 먼저 시카고의 간호 학교에서 수련한 뒤 33세에 중국의 선교사로 파송되어 상해와 소주에서 10년간 선교사역을 수행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조선에 여성을 위한 여선교사가 필요하다는 소식을 듣고 안정된 중국 사역을 뒤로 한채, 1897년 다시 한국의 선교사로 자원하여 파송되었고 이분을 뿌리로 하여 배화여학교, 종교교회, 자교교회가 세워졌습니다. 20년 간의 헌신 후에 1918년 미국으로 돌아가 병을 얻자 조선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는 소원을 따라 1920년 조선에 다시 왔으며 그 해에 소천하고 양화진에 묻혔습니다. 우리가 지금도 그 이름을 일컫는 것은 그분의 아름다운 헌신으로 이 민족이 은혜를 입었을 뿐만 아니라, 역경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는 믿음의 헌신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