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읽기

2018. 9. 17 -21

순종과 관련하여 현대인들은 별로 달가워 하지 않습니다. 또 혹자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유의 삶인데 순종과 자유는 서로 배타적이므로 순종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징일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순종에서 나옴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율법 아래 있지 않다’(예, 갈5:18)는 바울의 표어를 가져다 잘못 적용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의 세계는 폐기되었으며, 바울의 말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을 제외한 모든 절대 기준에서 자유로워졌다는 뜻이라고 결론을 비약합니다. 전혀 잘못된 해석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율법의 의를 이루게 하려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죽으셨다는 것과 하나님이 우리 안에 법을 기록하려고 성령을 주셨다는 것 역시 말한 바 있습니다(롬8:3-4; 고후3:3, 6). 구약성경의 선지서에는 하나님의 두 가지 약속, 즉 자신의 백성 안에 성령을 주신다는 약속과 그들 안에 법을 두신다는 약속(참고, 겔36:27; 렘31:33) 사이에 사실상 전혀 구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수용되는 면에서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으며, 거룩함을 이루는 면에서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성령님의 능력 아래 있는 것입니다 (참고, 롬6:14; 갈5:18). 그러나 도덕적 기준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면에서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고전9:21)라는 것을 고백하여야만 합니다. 사실 도덕적 순종이라는 요건이 포함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주권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6:2).

그리스도인의 순종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양립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그것을 질문합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이런 예를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몇 년 전에 런던 우리 교회의 지체인 신앙심 있는 한 그리스도인 여성이 불신자 남성과 약혼을 하겠다고 발표했다. 아무래도 말하는 것이 도리일 것 같아 나는 신약성경이 가르치는 높은 기준, 즉 결혼이란 육적인 연합일 뿐만 아니라 또한 영적인 연합이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주 안에서’만 결혼하고 불신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아야 한다는 기준을 아는지 그녀에게 물었다(참고 고후6:14-16). 그녀는 “내게 선택의 자유가 있어야 하니까요. 내가 할 일을 예수님이 일러주시고 문제가 벌써 다 결정되어 있다면 나는 자유가 없는 거잖아요. 내게는 자유가 필요해요”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리스도인의 참 자유란 그리스도께 불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자유라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순종은 제자도에서 무시되고 있는 부분인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순종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실상 그리스도께서 지우시는 멍에는 우리가 자유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쉽고 가볍습니다. 그러므로 순종하여 자발적으로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9-30).

순종은 제자도에서 무시되고 있는 부분인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순종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요즘 우리 모두는 사업상의 윤리, 성생활, 이혼과 재혼, 생사가 걸린 낙태나 안락사 문제 등 여러 영역에서 도덕적 결정을 내려야 할 일이 많습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런 복잡한 의문에 쉬운 답을, 난해한 문제에 간편한 해결책을 주신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런 것을 구해서도 안 됩니다. 주님은 우리가 기독 지성을 개발하고 사용하여 자라 장성하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의 가르침에는 도덕적인 절대 기준과 그 밖의 도덕 원리들이 나옵니다. 우리는 그것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예컨대 의와 겸손과 사랑을 추구하는 기독교의 길은 산상수훈과 사도들이 쓴 서신서의 윤리 부분에 명확히 진술되어 있고, 복음서 자자들이 예수님 자신을 그린 네 펀의 그림에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도덕적인 어둠 속을 더듬어야 하는 신세가 아닌 것입니다. 문제는 성경공부와 기도와 동료 그리스도인들과의 토론을 통해 그리스도의 생각을 깨치고 우리의 생각과 뜻을 주님의 가르침에 복종시키고자 진지하게 노력하는 그리스도인가의 문제입니다.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고후10:5).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학교에 들어온 학생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발아래 앉으며, 내 생각과 뜻과 신념과 기준을 그분의 멍에 아래 두기를 원합니다. 다락방에서 그분은 사도들에게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요13:13)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선생’과 ‘주’는 그저 예의상의 호칭이 아니라 실체를 대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가르치는 선생이요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주이시며,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시와 훈련 아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행여 그분께 이의를 달거나 불순종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그럴 때마다 자칭 회심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주장은 그만큼 신임을 잃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적, 도덕적으로 회심하지 않은 한 우리는 참으로 회심한 것이 아니며, 우리의 생각과 뜻을 예수 그리스도의 멍에 아래 두지 않는 한 지적, 도덕적으로 회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마17:5).

사도들은 또한 교회 전체에 대한 예수님의 주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이며 옛 피조물과 새 피조물의 주인입니다. 그분이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입니다(골1:18). 이렇게 온 우주에 미치는 예수님의 주권은 지금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이지만, 어느 날 명백히 우리 눈앞에 나타날 실체입니다. 시간이 다시 영원으로 흡수되는 날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즉 그때는 둘 다 구속이 완성되었을 교회 전체와 피조세계 전체가) 그리스도 안에서(한 머리 아래) 통일되게” 하는 것이 종말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기 때문입니다 (엡1:10). 이런 종말론적 시각에 비추어보면 현대 교회의 위기가 분명히 드러납니다. 사실 교회의 연합을 막는 끈질긴 장애물은 성경에 없는 전통들을 애지중지하는 것(천주교의 특징) 아니면 성경에 있는 교리들을 버리는 것( 자유주의적 개신교의 특징) 둘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결국 머리 되신 그리스도 아래 연합될 것이라면 그때까지의 연합에도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주인이며 따라서 교회는 그분의 가르침이 아무리 입맛에 맞지 않아도 그분에게 복종하여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골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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