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2018. 9.10 – 14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고후10:5), 이 말씀은 우리 삶에 실천적인 목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거대한 군대의 병사들처럼 종종 반항적이고 때로 불온한 우리 마음의 무수한 생각을 사로잡아 그분께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분께 순종하여 참 자유를 얻습니다. 우리의 생각을 그리스도의 멍에 아래 둔다는 것은 우리의 이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계시에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을 그리스도의 생각에 복종시킨다는 이 개념은 오늘날 교회에서 다분히 무시되고 있습니다. 우리 중에는 베다니의 마리아를 닮은 사람들이 너무 적습니다. 마리아는 시간을 내어 예수님의 발아래에 앉아 말씀을 들었건만 우리는 그러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우리 삶은 너무 바쁩니다. 마르다처럼 우리도 활동주의자입니다. 우리는 묵상을 낯설어하며, 침묵보다 소음, 고요한 묵상보다 분주한 활동이 더 성미에 맞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우리는 이런 기도를 드려야만 합니다. “우리의 모든 몸부림이 잦아들기까지/ 주의 고요한 정적의 이슬을 내리소서/ 우리의 영의 염려와 근심을 제하시고/ 안온한 삶으로 고백하게 하소서/ 주의 아름다운 평안을, 주의 아름다운 평안을, ……”(J.G. 위티어).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롬12:9-13).

J.G 워티어는 계속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우리의 뜨거운 욕심 속으로/ 주의 서늘한 유향이 불어오게 하소서/ 감각이 둔해지고 육신이 물러나게 하소서/ 지진과 바람과 불을 통해 말씀하소서/ 오 작고 세미한 음성이여, 오 작고 세미한 음성이여!” 그러나 때로는 ‘우리의 뜨거운 욕심’이 그분의 서늘함을 짓누르고, 우리 삶의 천둥소리가 그분의 작고 세미한 음성을 삼켜버립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내 생각을 그리스도께 복종시킬 의향이 없을 때도 많습니다. 굳이 그래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자신의 견해를 더 좋아하며, 그것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상충해도 개의치 않습니다. 이때 우리는 중얼거립니다. “내가 그분께 고개를 숙여야만 하는 까닭이 무엇이냐?” 우리는 만유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이런 생각들을 쳐서 시급히 그리스도의 발 밑에 복종시켜야만 합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오래 전에 성공회의에서 “성령의 바람에 마음이 열려 있고, 성령의 불로 마음이 따뜻하며, 성령이 불시에 행하시는 일을 늘 살피는 사람”이 이상적인 주교라고 역설한 어느 분의 설교 한 대목을 인용하면서 성령의 불과 바람과 홀연한 역사는 그리스도나 성경을 떠나서는 구할 수 없다는 점을 덧붙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과 하나님의 말씀(성육하신 말씀이든 기록된 말씀이든)을 따로 떼려는 시도는 언제나 어리석고 위험한 과오를 낳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씀은 주교를 위시한 성직자뿐만 아니라 믿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임을 마음에 새겨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7:12).

오늘날 교회에는 세속주의의 시류에 굴복하지 않고 더욱 그리스도인답게 사고하는 사람들, 즉 자신의 생각을 그리스도의 멍에 아래 둔 그리스도인들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해리 블래마이어스는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사고해야 하는가 The Chritian Mind》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기독 지성은 기독교 역사상 유례가 없는 수준의 나약함과 무기력으로 세속의 시류에 굴복했다. 20세기 교회는 도저히 말로 표현이 안 될 정도로 지적인 사기를 완전히 상실했다….. 기독 지성은 더 이상 없다. 물론 기독교 윤리와 기독교 실천과 기독교 영성은 아직 있다….. 그러나 사고하는 존재로서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세속화에 굴복했다.” 그는 기독 지성을 “세상에서 벌어지는 논쟁의 데이터를 기독교의 전제들로 구성된 준거 틀 안에서 처리할 수 있도록 훈련되고 무장되고 지식을 갖춘 지성”으로 정의하였습니다. 이런 지적과 정의는 학자다운 날카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무리 영성이 있고, 기독교적 실천이 있더라도 그리스도를 본받아 형성된 지성이 없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무기력하게 세상의 조류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겨야만 합니다.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4:14-15)

해리 블래마이스는 “기독 지성의 표지”를 다음과 같이 여섯 가지로 꼽았습니다. (1)초자연 지향(세상이 하나님의 것이고 잠시 지나가는 것임을 인정함) (2)악의 인식(가장 고귀한 것들마저 ‘굶주린 허영’의 도구로 변질시키는 원죄) (3)진리의 개념(타협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계시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임) (4) 권위의 수용(우리에게 ‘대등한 관계가 아니라 굽힘과 복종’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계시) (5) 인격에 대한 관심(기계 문명에 예속되는 것을 물리치고 인간의 인격성을 옹호함) (6) 성례전적 시각(우리의 일상사 즉 주변의 여러 사물에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있음을 깨닫는 시각임. 예컨데 성적인 사랑은 현실에 인간의 마음을 열기 위한 ‘하나님의 가장 효율적인 도구 중 하나’임을 인식함) 등입니다. 결국 기독 지성은 범사를 그리스도인답게 생각하는 지성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지성이 하나님께서 계시해주신 전제들에 속속들이 흠뻑 적시어 있기 때문에 가능하며, 그 계시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고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되었습니다. 그럴 때에만 그리스도인들은 바울과 함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생각)을 가졌느니라”고 당당히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각이 곧 그리스도의 생각인 까닭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멍에 아래 두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모든 마음과 모든 목숨과 모든 정성(mind로서 지성의 부분임)을 다해서, 네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우선되는 계명이다. 두 번째 계명은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여라’인데 이것도 첫째 계명과 똑같이 중요하다. 모든 율법과 예언자들의 말씀이 이 두 계명에서 나온 것이다.” (마22:37-40 쉬운성경)

그리스도의 멍에는 지적인 차원뿐 아니라 도덕적인 차원도 있습니다. 그분의 권위는 우리의 생각을 넘어 우리의 행위에까지 미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의 가르침을 믿을뿐 아니라 자신의 명령대로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며, 우리는 이미 우리 건축의 기초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 그 점을 살펴보았습니다. 산상수훈을 마무리하는 짤막한 비유를 보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들은 인생의 집을 반석 위에 짓는 지혜로운 이들입니다. 그러나 듣고도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모래 위에 짓는 어리석은 이들입니다. 예수님은 순종을 원하실 뿐 아니라 순종을 지혜의 기준과 안전의 보증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분은 또 순종을 사랑의 시험대로 삼아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14:15)고 선포하셨습니다. 밤이 가면 아침이 오듯이 사랑에는 순종이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자들은 그분의 말씀을 지키지 않습니다. 거룩함으로 가는 길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그를 본받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알기 힘써야만 합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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