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8. 27 – 31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시려면 remain in’ 우리가 그분께 그것을 허용해드려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의 책임은 능동적이기보다 수동적입니다. 우리는 우리 삶을 주관하시는 그분께 날마다 새롭게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야 봄날 나무에 진액이 차오르듯 그분의 생명과 능력이 우리 안에 흘러들어올 수 있습니다. 반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려면’ 우리 쪽에서 능동적으로 취해야 할 몇 가지 조치가 있습니다. 그것을 19세기 라일 주교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내게 붙어 있으라. 내게 꼭 달라 붙어 있으라. 나와 가깝고 친밀하게 연합된 삶을 살라. 내게 점점 더 가까이 오라. 모든 짐을 내게 내려놓으라. 네 모든 무게를 내게 실으라. 단 한 순간이라도 나를 붙든 손을 놓지 말라.” 그리스도 안에 ‘머물라’ 혹은 ‘거하라’는 명령은 지칠 줄 모르고 집요하게 그분을 좇는 추구를 뜻합니다. 그것은 자신과 씨름하시는 주님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창32:26)라고 소리친 야곱의 정신입니다. 특히 우리는 ‘은혜의 통로들’을 사용하는 데 부지런해야 합니다. 날마다 시간을 정하여 기도와 성경 읽기를 통해 그리스도를 구하고,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는 등의 훈련에 숙달되어 있을수록 나머지 시간에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연합하여 그분의 임재를 누리고 그분의 생명과 능력에 의존하여 살기가 더욱 쉬워짐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15:5).
다른 사람의 ‘아래에’ 든다는 개념을 달갑게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하인’ 하면 다른 사람 밑에서 매여 일하는 사람을 뜻하고 조금이라도 심하게 일을 시키면 “내가 당신의 하인이냐?” 라고 말하면서 몹씨 화를 냅니다. 영어에서도 같습니다. 영어 단어 underling은 ‘말단 부하’, underdog은 ‘불의와 착취의 피해자’를 뜻합니다. 그러니 그리스도 ‘아래’ 있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 위치는 우리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것이 아닌가요? 오늘날 사람들이 가정, 학교, 대학, 교회, 정부, 부모, 교사와 고용주 등 기성 권위에 저항하는 주된 원인은 권위를 인간의 자유나 심지어 인간성 자체와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보는 데 있습니다. 인간이 어떻게 권위에 복종하고도 진정한 인간으로 남을 수 있는가? 이것은 반드시 다루어야만 하는 질문입다. 여기서 먼저 ‘폭정’과 ‘권위’의 차이를 분별하여야 합니다. 폭정은 자유를 배제하며 따라서 진정한 인간성에 근본적으로 위배됩니다. 그러나 권위는 폭정과 같지 않습니다. 즉 폭정은 자유를 파괴하지만 바른 권위는 오히려 자유를 보장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자유’를 강조하는 신약성경이 동시에 그와 전혀 모순되지 않는 개념으로 ‘권위’와 ‘복종’을 공히 강조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복종하는데는 굴욕의 요소가 조금도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롬:13:1-2)
주님의 주권에는 압제의 요소가 조금도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은 굴욕의 요소가 전혀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그리스도의 주권에 복종하는데는 굴욕의 요소가 전혀 없는 이유는 주님이 지닌 권위의 타당성 때문이며, 동시에 권위의 질 때문입니다. 타당성은 그분이 이 땅의 사역을 마치고 최후에 높이 들리신 사실에 근거합니다. 자기를 낮추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분이기에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9-11). 여기서 그분께 주어진 이름은 물론 ‘예수’가 아닙니다(그것은 출생 전에 주어진 이름입니다). ‘주’라는 호칭 또는 더 넓게 말해 다른 모든 것들 위에 뛰어난 지위와 명예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가장 높이셨다는 이 객관적인 진리를 일단 인정하면 우리가 그분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그분께나 우리에게나 지당한 일입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행2:36)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서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엡1:20-23). 여기서도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그분이 지극히 높아지셔서 우주 위에 좌정하신 관점에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위에’와 ‘아래’라는 말을 써서 그것을 표현하였습니다. 그분은 다른 모든 권세 ‘위에’ 높아지셨고 그리하여 만물이 그분의 발 ‘아래’ 놓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실제로 행하신 일이며 엄연한 기정사실입니다. 교회는 이 사실을 즐거이 인정할 때 자신의 정체를 발견합니다. 곧 그리스도는 머리요 교회는 그분의 몸, 그분의 충만함입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엡 4:15-16).
그리스도의 권위가 갖는 타당성이 틀림없는 것처럼 그 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은 주인으로 우리 ‘위에’ 계시고 우리는 종으로 그분 ‘아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관계는 우리의 개성을 말살하기는커녕 오히려 활짝 피어나게 합니다. 아이들이 안전하고 행복한 가정에서, 그 사랑의 훈육 안에서 가장 자연스럽게 자라 장성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그분의 사랑의 권위 아래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 장성합니다. 그리스도를 섬겨 이기적인 우리 자아를 잃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이 원래 의도하신 진정한 자신을 찾습니다. 우리의 삶을 향한 그분의 주권은 우리에게 좌절이 아니라 만족과 자유를 뜻합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에게는 부족한 것을 채우시고,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그런 사람이 되도록 성장해 가야만 합니다. 그 목표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 하나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러야만 합니다. 이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며 힘주시어 그리스도의 의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 안에 보내신 성령님이십니다. 우리는 결코 혼자 이 엄청난 일을 감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영의 힘을 입어 행하는 것이므로 기뻐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쉬지 말고 기도하시고 범사에 감사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십시요.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이고 진리를 알게 될 것이니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요8:31-32 사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