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2018.8.20 -24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 치심을 받았으니”(엡 1:13: 참고 갈 3:14).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새로운 신분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성령님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인 치심’이란 가축이나 노예들에 대하여 소유자가 자신의 소유물임을 나타내기 위해 불 인두로 낙인을 찍는 것을 말합니다. 이 같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은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자신의 소유로 도장을 찍어 구별하시는 표입니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나무 잎이 흔들림을 보고 그 존재를 알 수 있듯이, 성령님 역시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하여 그분이 우리 안에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1 Cor. 12:3 ).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롬8:9).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분명히 하나님은 그 아들을 통해 우리를 구속하실 뿐만 아니라 성령님을 통해 우리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십니다. 이때부터 성령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켜가십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새 신분, 새 생명, 새 피조물, 이 복들을 우리는 따로 떼어서는 안됩니다. 그것들은 서로 맞물려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받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굶어죽을 듯이 가난에 찌들고 병든 거지가 누더기 차림으로 우리를 찾아온다면, 그를 샤워실에 들여 씻어주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것입니다. 그가 영양실조에다 병까지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에게는 음식과 병원 치료가 추가로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영적으로 굶어죽을 듯이 가난에 찌들고 병들어 죄의 누더기 차림으로 그리스도께 나아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접받고 목욕도 하고 옷도 갈아입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새로운 신분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명의이신 하나님은 우리가 병든 것을 아시며, 그래서 우리 안에 성령님을 보내시어 우리에게 새 생명과 건강을 주시고, 우리가 원기를 되찾아 튼튼해지도록 말씀으로 우리를 먹이십니다. 하나님은 임시변통으로 대충 때우시는 법이 없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2-14).

지금까지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그리스도인 개개인과 그분의 연합으로 보았습니다. 그것은 개인에게 새 신분과 새 생명 그리고 새 피조물이라는 놀라운 복을 가져다줍니다. 예수님은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요15:5)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과 사도들은 그 복들을 개인에게 적용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개인적인 복이 따르는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그러나 동일하게 거기에는 공동체적인 차원도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15:22). 여기서 사도는 서로 다른 두 공동체를 대비하고 있습니다. 한편은 시조 아담과의 연합을 통해 그의 죽음에 동참하는 타락한 인류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시조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그의 생명에 동참하는 구속받은 인류가 있습니다. 인간은 모두 태어나면서부터 ‘아담안에’ 있기 때문에 옛 인류에 속하나, 구속받은 새 인류에 속하려면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중생이 필요합니다. 일단 믿음과 중생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면 우리는 그 자체로 새 인류 즉 하나님이 지으시는 새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엡2:19-20)

사도 바울은 흔히 인간들을 서로 갈라놓는 장벽들, 특히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막힌 담’과 ‘원수 된 것’이 이 새로운 공동체 안에서 허물어졌다고 선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심으로 그것을 폐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유대인과 이방인은 함께 하나님의 가족이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입니다(참고 2:13-3:6). 장벽의 철폐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전의 한 편지에서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고 썼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인종적, 사회적, 성적 구분이 문자적으로 없어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의 피부색은 결코 달라지지 않으며, 사회문화적인 풍습이나 말의 억양도 꼭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나아가 남자는 그대로 남자, 여자는 그대로 여자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인종이나 계층이나 성별과 무관하게 하나님 앞에 절대 평등합니다.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낮아짐을 경험합니다. 자기 자신을, 또한 서로를 똑같이 죄인과 범죄자로 볼 때 우리는 같은 수준으로 낮아져 똑같이 그분의 은혜에 의존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별이나 차별없이 서로를 반깁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연합한 결과로 모두 한 가족, 한 형제자매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일부 교회 가운데는 이런 말이 현실이기보다는 희망사항에 가까운데 우리는 새 공동체를 현실로 보여주어야 할 막중한 책임을 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빌4:1).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어 인격적, 유기적으로 그분과 연합되어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엄청난 복, 즉 새 신분(우리는 그분과 바른 관계에 놓인다), 새 생명(우리는 성령님으로 새로워진다), 새 공동체(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이다)를 주십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회개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 그분께 자신을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렇게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킵니다. 그리고 그분과의 그 연합은 침례를 통하여 극적으로 공표됩니다. 바울의 말처럼 침례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갈3:27). 나아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살아 있는 성장의 체험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과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어른)” 둘 다에 대해 말할 수 있었습니다(고전3:1). 그러므로 이제 우리에게 남아 있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자라갈 것인가? 이 질문은 우리를 다시 예수님의 말씀으로 데려갑니다. 거기에 해답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4-5). 그러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이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