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3:17
1930년대 들어 태화여자관 사업은 더욱 확대되어 매일 500명이 넘는 이용회원을 수용하기엔 공간이 좁았고 조선식 기와집들이 서구적 사회복지 사업을 전개하기에는 불편하였다. 결국 선교부와 태화 직원들 사이에 오랜 논란 끝에 ‘사업을 위해 유적을 허물기로’ 하였으며 2년 공사 끝에 1939년 11월 연건편 718평 규모의 3층짜리 석조 건물을 지었다. 이 건물을 지으면서 백년 넘은 옛 건물과 정원이 헐렸고 유치원으로 사용되던 ‘별유천지 6호실도’ 헐렸다. 이 건물의 설계자는 강윤(1899-1974)으로 그는 동서양 건축 양식을 절충한 건물을 설계했으며 숨겨진 아름다움은 3층 예배실에 있었다. 여기에 강윤은 태극문양을 새겨 넣었다. 숨은 그림 찾기 처럼 눈여겨보야야만 찾을 수 있는 것은 일제 말기 상황에서 꺾이지 않는 민족의지를 보여주려는 건축자의 숨은 의도를 담고 있다. 강윤은 한국 근대 건축 개척자의 한 사람으로 꼽혔고 3.1운동 당시 공주 영명학교 졸업반 때 공주지방 만세시위에 가담하여 옥고를 치룬 뒤 윌리엄즈 선교사의 주선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부리스라는 미국인 건축가를 만나 건축을 배웠다. 평신도 선교사로 일본에서 ‘오미형제사’라는 건축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던 부리스는 강윤을 한국 대리인으로 내세워 한국에도 많은 건축물을 남겼다. 1933년 귀국하여 활동하기 시작한 강윤의 작품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이다. 신촌 이화여대 본관과 강당, 음악관, 공주 공제의원, 신세계백화점, 수유리 한신대학교 본관, 흑석동 중앙대학교 본관 건물, 세브란스 병원, 연희전문학교, 평양 광성중학교, 함흥 영생 중학교, 철원제일교회등을 지었다. (이덕주, 종로 선교 이야기, 42-54). 건축가 강윤과 같이 우리는 말을 할 때나 일을 할 때나 무엇을 하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함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사실을 각인하여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