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신령한(영적인, spiritual) 복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들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사실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만,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오는 모든 신령한 복이 우리의 것이 됩니다. 친밀한 인격적 연합을 통해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심으로 하늘 아버지는 우리에게 주실 복을 모두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복들은 무엇일까요? 에베소서 1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세 가지 주된 복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새로운 신분의 복입니다. 고대나 현대나 사회에서 ‘신분’이라는 단어는 중요합니다. 대부분 우리 자아상은 사회적 신분과 맞물려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신분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직함과 감투와 큰 집과 좋은 차와 배지 그리고 정복을 좋아합니다. 또 영향력 있는 사람들과의 연줄을 좋아하여 대화 중에 은근히 그들의 이름을 ‘흘리곤’ 합니다. 그것들이 다 신분의 상징물이며 우리의 자아를 부풀려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다른 신분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사회적 신분이 아닌 영적인 신분으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입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1:4-5).
세상의 사회적 신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라는 영적인 신분은 경건하며, 훨씬 더 중요하고 만족스러운 신분으로, 그 자체로 우리의 자아상을 세우고 참된 자존감을 심어 주기 충분한 신분입니다. 그것은 바로 주 하나님 자신께 사랑받고 수용되고 자녀로 입양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에베소 1장 첫머리로부터 나오는 구절들에서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주어진 바로 이 신분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는 구구절절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하면서, 말하는 복마다 번번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그것이 우리 것이 된다고 지적합니다. 즉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려고 택하셨고(4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녀로 입양하셨다(5절). 또 그분은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은혜를 값없이 부어주셨고(6절),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구속과 죄 사함을 주셨다(7절). 한편, 각 구절마다 등장하는 동사들은 우리의 새로운 신분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시고 입양하시고 수용하시고 구속하시고 용서하셨다’라는 5중 축복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엡1:7).
여러분 하나님께 수용되고 입양되고 용서받은 자녀가 되는 것보다 더 놀라운 ‘신분’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 그 이상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 사도 요한은 감격하여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요일3:1). 일단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면 성부 하나님은 우리를 더 이상 죄 가운데 있는 존재로 보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보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분은 우리 입양된 자녀들을 마치 자신의 영원한 아들 그리스도를 사랑하시듯 사랑하십니다.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기쁨과 특권을 누누이 되풀이해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져서 ‘의롭다 함’을 얻고(갈2:17),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아브라함의 영적 자손이고(갈3:26, 29),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결코 정죄를 받지 않고(롬8:1),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세상 끝날까지 받는 특권을 가집니다.(롬8:39). 그러므로 주님을 믿는 우리는 항상 기뻐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쉬지말고 기도하고 모든 일에 감사를 넘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받는 두 번째 복은 새로운 신분을 그리스도 안에서 받는 것 훨씬 이상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새 생명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신약의 가르침을 균형 있게 이해하려면 이 사실을 아는 것이 말할 수 없이 중요합니다. 이집트는 인구 약 10%가 그리스도인이며, 그중 대다수는 콥트 정교회에 속해 있습니다. 1978년 1워부터 3월 사이에 정교회의 주간 신문인《알 키라자》에 ‘칭의- 의롭다 여기심’에 관한 연재 기사가 실렸습니다. 이 기사는 마르틴 루터가 가르치는 칭의는 내면의 혁신이나 성품의 의가 전혀 없는 ‘단지 의롭다는 판결’일 뿐이라는 것이 그의 견해였습니다. 다시 말해 개신교의 ‘이신칭의- 믿음으로써 의롭다함을 인정받음’ 교리는 생활이나 성품의 변화 없이 신분의 변화만 일으킨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개신교를 오해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를 근거로 의롭다고 선언하지 않으시고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을 보고 의롭다고 선언하시지만, 이런 칭의와 동시에 성령님을 보내주셔서 중생하게 하십니다. 즉 새로운 생명을 넣어주사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의 선행은 칭의에 필수적으로 따라 나오는 열매요 증거이며, 사랑의 열매가 없는 믿음만의 고백은 죽은 믿음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칭의는 사랑의 열매 즉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8:4).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논문》에서 “선행이 선인을 만들지 못하나 선인은 행실이 선해진다”라고 갈파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콥트 정교회는 확실히 개신교를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논쟁을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값진 교훈은,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자녀로서의 ‘새 신분’과 이와 동시에 성령님을 통해 부여하신 ‘새 생명’을 언제나 간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칭의와 중생,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령의 사역 이 두가지는 분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와 ‘그리스도 안에’라는 두 부사구, 그분의 중보와 그분과의 연합을 함께 두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해야 합니다. 칭의는 법률 용어로 정죄의 반대이며, 하나님이 죄인을 자신 앞에 의롭다고 선포하시는 행위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이는 칭의를 얻은 죄인을 변화 없이 그대로 두는 법적 허구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죄인이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만 의롭다 하시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성품과 행실에 일대 변화를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디도서 3: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