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참된 의미는 그분과의 인격적인 연합을 말합니다. 이 연합의 의미에는 몇 가지 중요한 측면이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필수 불가결한 것입니다. 즉 우리가 연합을 지각하고 체험하는 방식은 서로 다를 수 있으나, 연합 자체가 없이는 아무도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신분의 파장과 책임을 두고 논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그리스도인의 정의를 놓고 갑론을박한다는 것은 기이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입니다. 천주교와 그리스정교회의 전통은 세례를 받고 교회에 적을 올리는 것을 강조하고, 개신교는 복음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오순절 교파는 성령의 권능을 중시하며, 자유주의 전통은 예수님을 본질상 “남을 위한 인간”으로 보고 그리스도인의 구제 사역과 사회 정의의 추구를 참 제자의 특징으로 여깁니다. 이 모든 것들은 물론 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적인 요소들이지만, 그리스도인이 누구냐에 대한 신약성경의 정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사는 사람이며, 세례와 신조와 행동은 그 결과로 자연히 뒤따르는 것입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고후13:5).
에버딘에 있는 킹스 칼리지에서 신학교수로 지내다가 1678년 2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헨리 스쿠걸(Henry Scougal)은 《인간의 영혼 안에 계신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영향력 있는 소책자를 썼습니다. 그 책에서 그는 자기 시대에 참 종교(기독교를 의미)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 너무 적다며 탄식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종교의 본질을 “정통 개념과 견해”에 두고, 다른 이들은 “외면적 직무”(종교적 그리고 도덕적)에 두는가 하면, “모든 종교를 감정에, 즉 뜨거운 기쁨과 황홀한 감격에 두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종교의 본질은 지적인 것만도 아니고, 행동적인 것만도 아니며, 감정적인 것만도 아닙니다. 그것은 “영혼이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 영혼에 새겨진 하나님의 형상, 곧 신의 성품에 진정으로 참예하는 것 또는 사도의 표현으로 우리 안에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의 형상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생명의 뿌리는 믿음이고, 그 굵직한 가지들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 인간을 향한 자비, 그리고 순결과 겸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생명이 없다면 그런 외면적 도의만으로는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는 것은 “꼭두각시를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1734년에 옥스포드 대학에서 찰스 웨슬레가 조지 윗필드에게 빌려 주어, 1년쯤 후에 윗필드가 중생하는 데 이 책이 일조하였습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가 6:8).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참된 의미는 그분과의 인격적인 연합을 말합니다. 이 연합의 두 번째 중요성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신약 복음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바울 서신에 ‘그리스도 안에, 주 안에, 그 안에’라는 표현은 모두 164번 등장합니다. 에든버러의 뉴 칼리지의 문학과 신학 교수였던 제임스 스튜어트 박사는 1935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 A Man in Christ》이라는 제목으로 ‘바울 신앙의 핵심 요소’를 발표하였습니다. 스튜어트 박사는 “바울이 말하는 신앙의 핵심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다른 어떤 개념보다도, 곧 칭의나 성화나 심지어 화목하게 됨보다도 이것이 그의 영혼의 비밀을 여는 열쇠이다. 바울의 모든 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하나의 위대한 사실로 수렴된다.” 그 결과 “그리스도인이 경험하는 서로 다른 요소들은 각기 별개의 사건들이 아니라 한 실체의 단면들이고, 평행선이 아니라…. 한 동심원의 반경이며, 그 원의 중심은 곧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라고 확신하였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강조한 것은 예수님 자신의 생각과 가르침이며, 그중에서도 특히 포도나무와 가지에 대한 비유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요한 15:5-6).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참된 의미는 그분과의 인격적인 연합을 말합니다. 이 연합의 세 번째 중요성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전 세계의 종교 가운데 기독교만의 독특한 특성입니다. 신봉자들에게 그 종교의 창시자와 인격적으로 연합할 것을 제시하는 종교는 하나도 없습니다. 불자는 부처를 안다고 주장하지 않고, 유교 신봉자도 공자를 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무슬림도 모하메드를 안다고 주장하지 않고, 맑스주의자도 칼 맑스를 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고 (바라기는 겸손하면서도 당당하게) 주장합니다. 다른 종교 신자들은 자기네 종교 창시자를 옛 스승으로 돌아보며 경애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예수님은 먼 옛날 스승 이상입니다. 그분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살아계신 구주와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친밀하고 생생한 사랑의 관계 속에서 그분과 동행하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분을 안다고 감히 증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 스티븐 닐 주교는 “기독교란 특정한 개념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라는 한 인격체를 인격적으로 신뢰하고 헌신하는 태도이다. 우리가 믿기는 그 인격체는 살아계시며 만인에게 가까이 와계신다. 이 친밀하고 인격적인 신뢰와 헌신과 연합의 관계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 자체임을 밝혀준다”라고 잘 정리하여 표현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엡 3:17-18).
우리가 며칠 동안 생각해 보았듯이, 그리스도 예수와의 연합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신약의 복음, 기독교의 독특성의 본질이 됩니다. 그렇다면 그런 연합의 관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놀라운 복을 주는가를 살피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에베소서는 다음과 같은 찬양으로 시작됩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엡1:3). 사도는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복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을 송축합니다. 그것을 그는 ‘신령한(영적인 spiritual)’ 복이라 부르며 ‘하늘에’ 속한 것이라는 수식어를 붙였습니다. 에베소서에서 그가 즐겨 사용한 ‘하늘’이라는 표현은 ‘보이지 않는 영적 실체의 세계’를 의미합니다. ‘신령하다’와 ‘하늘에 속하다’라는 두 수식어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신비 체험으로 돌리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그의 가르침은 매우 실제적이며 현실적입니다. 지금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영적인 복을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물질적인 평안이나 형통과 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복들은 오직 어둠의 세력을 완전히 정복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받을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렇게 정복하신 결과로 그분은 지금 모든 적들을 발 아래 두신 채 ‘하늘에서’ 가장 높은 자로서 다스리고 계십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엡4: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