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터예배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12:15).

패러다임은 토마스 쿤이 처음 사용한 말로서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을 말합니다. 세상을 보는 방식, 즉 패러다임을 전환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사고의 틀을 깨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21세기를 이끌어가는 지도자들에게는 모성형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모성형 리더십은 서비스 정신이 근간으로서, 그 바탕에는 엄마가 아이를 돌보듯, 고객과 조직 구성원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음을 봅니다. 그리고 최고경영자는 마치 엄마가 되어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직원의 신체건강은 물론 정신건강도 챙겨 주고, 또한 윽박지르며 목표 달성을 독촉하기보다 임직원의 아픈 곳을 어루만져 주고 그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동기부여를 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가문 경영을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명가의 초석을 쌓은 전통 사회의 아버지들은 통상 완고하고 권위적일 것이라는 선입견과 달리 오히려 배려하고 섬세하게 돌보는 모성형 리더십을 소유한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그 대표자로 퇴계 이황과 청계 김진을 들고 있습니다.

퇴계는 대학자이지만 그 바쁜 와중에서도 자녀뿐만 아니라 먼 친인척의 자제들까지 꼼꼼하게 챙겼습니다. 그는 좋은 친구과 함께 지내며 학문을 닦는 것을 중시했기에 아들과 손자, 조카뿐만 아니라 형의 외손, 질녀, 형의 사위, 형의 손자, 조카의 글공부와 어려움을 힘닿는 대로 보살폈습니다. 그가 돌본 후손은 모두 90여 명에 달했습니다. 공부를 하지 않는 후손이 있으면 고기를 선물하면서까지 학문을 독려하기도 했습니다. 퇴계가 맏형의 외손자 민응기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입니다. “시원한 밤 책 읽기 좋을 때다. 시간을 아껴라. 좋은 계절에 고요한 절에서 힘써 공부해 주기 바란다. 술 한 병, 닭 한마리, 생선 한 마리, 고기 한 덩어리를 보낸다.” 과연 큰형의 외손자까지 챙기는 자상한 할아버지입니다. 한편, 의성 김씨를 일으킨 청계 김진은 청운의 꿈을 접고 백년대계를 기획하는 일에 착수했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에 대하여 한 블로그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를 적고 있습니다.

“문장이 뛰어난 청계선생은 생원이 된 후 대과를 준비하고 있을 때 한 관상가를 만났는데, 그가 말하기를 “살아서 벼슬을 하면 참판에 이를 것이나 자손 기르기에 힘쓰면 죽어서 판서에 오를 것이다.”라는 예언을 듣고 자신의 벼슬보다는 자손의 영예를 선택해 대과를 포기하고 자손들의 학문 장려에 힘썼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다섯 아들인 약봉(藥峯) 극일(克一), 귀봉(龜峯) 수일(守一), 운암(雲巖) 명일(明一), 학봉(鶴峯) 성일(誠一), 남악(南嶽) 복일(復一)이 모두 과거에 급제해 이 집을 오자등과댁(五子登科宅)이라 불리게 되었고, 자손들이 높은 벼슬을 하였으므로 청계선생은 이조판서에 증직되어 이 집을 육부자등과지처(六父子登科之處)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1882yh&logNo=30124803945&parentCategoryNo=&categoryNo=99).

청계는 퇴계에게 자신의 다섯 아들을 제자로 보내 그의 학문뿐만 아니라 넉넉한 마음을 흡수하도록 했습니다. 퇴계의 리더십으로 회자되는 게 ‘너그러움’입니다. 그래서 퇴계 문하에는 늘 제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청계는 8남매를 남겨 두고 그의 아내가 죽자 새장가도 가지 않고 자녀 양육과 함께 교육에 전념했습니다. 청계의 노력으로 그의 다섯 아들은 모두 과거시험에 합격하면서 가문의 기초를 내리기 시작해 500년이 흐른 지금도 영남의 내로라하는 명문가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청계 김진의 다섯 아들과 그 후손들이 남긴 종택은 무려 여섯 곳에 이릅니다. 종택은 동학혁명이나 해방 후 좌우익의 대결로 인해 불에 타 없어진 경우가 많지만 이들의 종택은 단 한 곳도 불에 타지 않고 6곳 모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청계가문이 그만큼 지역민들로부터 존경받는 가문이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최효찬, 지금 실천하는 인문학, 172-75).

여러분 어떻게 인생을 계획하고 살아가시겠습니까? 청계 가문이 그런 명예를 남겼더라도 거기에는 영생이 없습니다. 영생은 오직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인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를 나누는 것으로부터 나옵니다. 주님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삶이야말로 참다운 진리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뜻을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뜻은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어떻게 이웃을 사랑해 주겠습니까?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12:15)는 말씀을 주님의 사랑 안에서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게이트웨이 침례신학대학원 총장인 제프 욜즈 박사는 이런 간증을 들려주었습니다. 자신이 처음으로 암 수술을 하게 되었을 때 자신의 교회를 다니는 노인부부 세쌍이 새벽에 병원에 미리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무엇을 하시는 거죠?” 라고 욜즈 박사는 물었습니다. “우리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라는 그들의 대답은 욜즈 박사의 영혼을 불태웠고 그분의 눈에 눈물을 쏟게 하였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가장 의미 있는 관계가 붕괴될 때, 비록 여러분이 그 사람의 행동에는 동의하지 않을지라도, 이때가 우리의 사랑의 섬김이 필요할 때임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일하고 계시고 그들은 당신의 인도를 필요하고 있는 것입니다.(뱁티스티 151권, 9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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