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2018.7.30 – 8. 3

모든 그리스도인 교사들은 집을 짓는 자로되 다만 각자 현장에 이를 때 건축의 단계가 다를 뿐입니다. 고린도 교회를 세우는 데 있어서 바울 자신은 기초를 놓는 특권이 주어졌기 때문에, 그는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기초)를 닦아 두는” 사람이 되려고 하였습니다. 그가 닦아 둔 기초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바울 이후에 아볼로와 다른 사람들이 와서 그가 닦은 기초 위에 집을 세웠는데, 바울은 그들에게 재료를 신중히 사용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나무나 풀이나 짚” 즉 온갖 거짓된 가르침은 타버릴 것이요, 오직 “금이나 은이나 보석” 즉 그리스도의 바른 가르침만이 심판 날에 마지막 불의 연단을 견딜 것입니다.(참고 고전3:10-15). 바울은 “다른 터는 없다”고 했고, 베드로는 “다른 이름은 없다”고 했습니다(행4:12). 우리는 그 이름 위에서 쉬고 그 기초 위에 짓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만 우리는 사도 유다의 말씀을 가지고 소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유1:20-21).

고린도후서12장 2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 사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자”라고 고백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은 사실상 사도가 자신을 두고 한 말이라고 풀이됩니다. 즉 사도 바울은 셋째 하늘에 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셋째 하늘이 어디를 이야기 하는지 사도 바울은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 역시 중요합니다. 우리 삶의 초점은 신비한 이야기에 두지 말고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에 맞추어야만 합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라는 단어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가족들이 건물 내부에서 함께 저녁 시간을 보내고, 행주를 찬장 안에 두고, 연장을 상자 안에 두듯이 그렇게 그리스도 ‘안쪽에’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우리가 그분의 내부에 자리하거나 안전하게 그분 안에 갇혀 있다는 뜻이 아니라 아주 친한 인격적인 관계로 그분과 연합되어 있다는 뜻으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부활하신 주님으로 모셔들일 때 믿음으로 연합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그 사람은 영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전15:22).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로 그분과 연합된다는 의미로서, 예수님은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로서 이를 의문의 여지 없이 밝혀주셨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은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4-5)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비유로 보건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거기 거한다는 것은 분명히 그분과 함께 살아 있는 성장의 관계를 누리는 것입니다. GNB(Good News Bible) 역본이 ‘그리스도 안에 in Christ’를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union with Christ’로 옮긴 것은 정확하게 의미를 전달하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연합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없으면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시지 않고, 거룩한 삶 사랑의 삶도 불가능하며, 마지막 날에 우리는 생명의 부활이 아니라 심판의 부활로 나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아담과 연합하였기 때문에 죽는 것과 같이, 같은 식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모든 사람이 생명으로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고전15:22의 영어역인 GNB를 한국어로 번역)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두 가지 모형으로 설명하였습니다. 첫째는 교회를 살아 있는 유기체 즉 그리스도의 몸으로 보고 각 그리스도인을 그분의 몸의 지체로 본 것입니다. 그는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12:27)고 썼고, 다시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12:4-5)고 말했습니다. 이렇듯 그리스도와의 관계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바울이 사용한 또 다른 비유는 그보다 한결 더 대담합니다. 그는 남편과 아내가 결혼 안에서 ‘한 몸’이 된다는 창세기의 말씀을 언급하며 “주와 합하는 자는(그분과) 한 영이니라”(고전6:17)고 말하였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 사이의 깊고 인격적이고 친밀한 사랑을 일컫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게 되면 그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고, 그분을 사랑하면 그분의 뜻을 행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으라는 사도의 말 역시 의미심장합니다. “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고전16:21-22).

그리스도인 사이의 연합을 위한 주님의 기도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긴 기도문을 보면, 그분은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21절)라고 기도하십니다. 이는 두 분이 서로 인격적인 관계인 것처럼 우리도 아버지와 아들과 더불어(“우리 안에”) 인격적인 관계를 맺게 해 달라는 요청입니다. 이 기도에는 엄청난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아들을 영원한 삼위일체의 신비 속에 하나로 묶는 사랑의 관계가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에도, 또한 우리 서로 간의 관계에도 나타나는 모습을 그리셨습니다(23절). 모형은 다 다르지만 말하려는 진리는 똑같음을 알아야 합니다. 가지가 나무에 연합되어 있고, 사지가 몸에 연합되어 있고, 남편과 아내가 서로 연합되어 있고, 성부와 성자가 삼위일체 안에 연합되어 있듯이, 그리스도인도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는 의례적인 인연이나 대강 알고 지내는 사이보다 훨씬 깊고 심지어 친한 친구보다도 깊습니다. 그것은 삶과 사랑을 함께 나누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생생하고 친밀한 유기적 연합입니다. 그 충만한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뜻을 행하게 하는 원동력임을 알아야 합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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