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5:1-10
“나는 걷는다”의 저자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62살의 나이로 1999년 5월 6일 이스탄불을 출발하여 2003년까지 4년 동안 걸어서 중국의 시안에 도착했습니다. 도합 12,000킬로미터의 실크로드 전 구간을 도보여행했습니다. 한 번의 도보여행으로 전 구간을 여행한 것이 아니라 세 번에 걸쳐 하였습니다. 이런 도보여행은 용기와 의지,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저자 역시 장염에 걸쳐 죽다 살아난 경험, 여러 번이나 도적을 만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경우, 탈수 증세로 여행을 일시 포기해야만 하는 경우들을 포함해서 결코 쉽지 않은 여행이었습니다. 그러나 올리비에는 “걷는 즐거움 못지않은 새로운 만남에 대한 열망이 자신에게 길을 떠나라고 부추긴다”라면서 도보여행의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올리비에는 프랑스의 “르 피가로”지 등에서 30년 동안 기자로 일하다가, 60살에 정년퇴직했지만 아내와 사별하고, 자식들이 독립해 떠나가면서 극도의 우울증에 빠져 자살을 기도한 적도 있습니다. 다행히 자살에 실패한 뒤 파리를 떠나고 싶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1,300킬로미터를 걸었고, 이어서 이 거리의 십 배에 해당하는 실크로드를 걸어 종단하기로 목표를 세웠습니다. 매년 봄부터 가을까지 기간을 정해 단 1킬로미터도 빼먹지 않고 걸어서 실크로드를 여행했습니다. 그는 은퇴 후의 삶을 도보여행을 통해 재활한 것입니다. 올리비에는 10대 시절 건강이 좋지 않아 달리기와 걷기를 시작해 결국 건강을 되찾은 경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자 생활을 할 때도 틈나면 걷기와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으며, 뉴욕 마라톤 대회를 포함하여 마라톤 대회에 20번 넘게 참가했고, 100킬로 행군도 수차례 참가했다고 합니다. 도보여행을 통해 “그 길에는 지식과 문화와 토양이 된 육체와 정신, 근육과 머리를 위한 양식이 있었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올리비에는 실크로드 도보여행을 하면서 원칙을 하나 세웠는데,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걷기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도보여행은 자신과의 약속입니다. 포기해도 누구도 비난하지 않지만 도중에 포기하는 것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는 것이요, 자신과의 약속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도보여행은 자신과의 약속을 이행하는 것이고, 그렇게함으로써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게 되고, 자신에게 무한한 자긍심과 함께 감동을 주고 기적을 일으키는 원천이 될 수 있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힘에 착안한 올리비에는 ‘쇠이유’라는 비행 청소년의 사회복귀를 돕는 협회를 창설했습니다. 걷기를 통해 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입니다. 15세에서 18세 사이의 소년 소녀들이 사회에 복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협회의 목적입니다. 아무도 돌봐 주지 않는 희망 없는 젊은이들은 범죄에 빠져 들기 쉽습니다. 쇠이유는 교도소나 수용 시설에서 생활한 청소년들이 낯선 나라를 도보여행하면서 재활 의지를 다지는 것으로, 도보를 통해 자신을 치유하는 걷기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두 명의 청소년이 짝을 이뤄 한 명의 인솔자와 함께 떠나 2,000-2,500킬로미터를 4개월 동안 걷는 과정입니다.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 사항은 단 한 가지로써 MP3와 같이 녹음된 형태의 음악을 가져가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텐트를 치고, 장을 보고, 요리를 합니다. 그리고 걷습니다. 장거리 여행을 하는 동안 그들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목적없이 범죄로 빠져든 것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그게 도보여행을 통한 치유의 힘입니다. 올리비에는 늦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시기에 새로운 도전에 나섰고 그것은 아름다운 노년의 도전으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최효찬, 지금 실천하는 인문학, 285-91).
여러분은 삶의 목적으로 무엇을 정하거나 정했고, 이를 수행하기 위해 어떻게 사실 것입니까? 삶의 목적은 하나님의 뜻 즉,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람들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갈 것을 정하는 것이 올바릅니다. 결국 이 말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목표로 정하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많은 어려움과 변수가 작용하고 있어 믿음 없이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 믿음은 반드시 사랑 가운데서 일하여야만 합니다. 이 사랑은 에로스적이 아니고 아가페적입니다. 에로스적은 사랑하는 대상이 가치가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린아이가 하는 짓이 귀엽기 때문에 사랑하고, 남자가 보기에 상대방 여성의 외모가 아름답기 때문에 끌리며, 상대방이 친절하게 대하여 주기 때문에 나도 친절히 대해 주는 것으로 자연적으로 발생합니다. 그러나 아가페적 사랑은 사랑할 가치가 전혀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친절히 대해주고, 도와 주며, 선한 말로 위로하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과 같은 사랑을 말합니다. 이 아가페적 사랑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인격적이고 창조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가페적 사랑의 목적은 단순히 선한 대우를 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변하여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되도록 바꾸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랑을 행하기가 매우 어렵지만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계시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그분을 따라가면 우리가 그분의 도움을 받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돌리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의를 행하고, 사람들을 사랑하며, 겸손하게 성령님과 동행하는 오늘 하루를 살아가야만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