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7. 23-27
리차드 범브란트 목사님이 1948년 믿음 때문에 루마니아의 어느 감옥에 갇혔을 때였습니다. 목사님은 자신 앞에 놓여있는 심한 고문과 심문, 어쩌면 수년 동안의 감옥생활과 죽음까지도 놓여 있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 모든 것을 견딜 만큼 자신의 믿음이 강한지 의심이 되었습니다. 이 때 목사님은 성경에 하루 하루를 위해서 366번이나 ‘두려워하지 말아라’라는 말씀이 적혀 있는 것을 기억했습니다. ‘365번이 아니고 윤년까지 생각해서 366번이나!’ 그리고 바로 그 날이 2월29일이었는데, 이 사실이 더 위안을 주었다고 합니다. 결국 목사님은 14년 동안의 감옥생활을 하나님의 은혜로 견디고 출감하였고 2001년 92세의 일기로 하나님 나라로 가셨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약속하셨을 뿐 아니라 영원한 언약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친히 맹세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맺으신 이 언약은 그분 자신의 ‘영원한 인자하심’으로 보장됩니다. 이런 믿음의 기초가 있기에 우리에게는 믿지 않을 핑계가 없습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이 몸의 소망 무언가 우리 주 예수뿐일세’(488장)라는 찬양은 19세기 중엽에 26년간 영국 서섹스 호셤에서 사역한 침례교 목사 에드워드 모트가 지은 찬송시로 이런 진리를 명확히 선포하고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에드워드 모트의 찬송시(찬송가 488장)는 반석과 모래라는 두 기초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찬송가에는 ‘모래’에 관한 언급이 없지만 원문 후렴에는 ‘다른 기초는 다 가라앉는 모래’라는 소절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자신의 가르침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산상수훈에서 그분은 각각 반석과 모래 위에 집을 지은 두 사람을 짤막한 비유로 그려 보여주시고 말씀을 마무리하셨습니다. 준공하여 입주했을 때 두 집은 아마 똑같아 보였을 것입니다. 크기나 모양이나 장식에 별다른 차이가 없었을 것입니다. 유일한 차이는 기초에 있었지만 그것은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폭풍이 몰아치는 운명의 날까지는 그러했습니다. 그날이 오자 노아의 홍수 때처럼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창7:11)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었습니다. 반석 위의 집은 강풍에도 흔들리지 않고 든든히 서 있었지만, 모래 위의 집은 무너져 도저히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었습니다. 최고의 기초는 반석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반석 위에 믿음의 기초를 세워야만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듣고 그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마7:24-25)
『지진 국가에서 누리는 마음의 평화』 라는 책에서 피터 야네브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1906년 어느 날 새벽 샌프란시스코에 지진이 났을 때, 그 도시의 유명한 언덕들 꼭대기에 살던 일부 사람들은 어마어마한 진동에도 계속 잠들어 있었다. 그 암석 언덕들 위에 위치한 수많은 석조 건물들은 보강 장치가 없었음에도 별다른 피해 없이 지진을 견뎌냈다. 반면에 만을 따라 매립지 위에 지어진 주택들과 샌프란시스코 언덕들 사이의 충적토 위에 지어진 주택들에서는, 사람들이 지진 충격으로 침대에서 튕겨 나왔고 진동이 지속되던 60초 동안 일어설 수도 없었다. 토사가 두터운 평지에서는 많은 건물들이 완전히 붕괴되었다.” 이렇게 건물의 기초를 토사에 두는 것이 위험한 이유는 불안정성과 액화 현상 때문입니다. 즉 정상적인 조건에서는 안정성이 있어 기초가 되기에 적합해 보이는 토양도 일단 지진에 흔들리면 갑자기 ‘죽’으로 변해 액체처럼 흐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건물이 송두리째 주저앉거나 넘어질 수 있으며 광범위한 지역에 산사태가 발생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건물을 반석 위에 두는 중요성은 매우 크다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 역시 반석이신 그리스도께 두어 견고하게 건축하고 그분의 삶을 본받아 살아가야만 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시편18:2).
인생의 두 가지 기초는 무엇일까요? 주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인생의 집을 반석 위에 짓는 지혜로운 사람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사람이며, 모래를 기초로 택하는 어리석은 사람은 “나의 이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둘 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다는 점에 주목하여야만 합니다. 차이는 지각과 무지가 아니라 순종과 불순종입니다. 예수님이 독특하신 분임을, 즉 인간이 되신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주는 많은 증거가 있지만 그 중의 하나는 그분이 겸손하고 당당하게 이런 엄청난 주장을 펼치셨다는 점입니다. 그분은 이생에서 지혜와 어리석음의 차이, 그리고 내세에서 생존과 심판의 차이가 사람들이 자신의 가르침을 듣고 그에 순종하는지 불순종하는지에 달려 있다고 당당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반석과 모래의 비유를 가지고 철저히 개인에게 적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는 삶을 어느 쪽 기초 위에 세울지 결정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당연히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순종함으로 반석 위에 지어야만 할 것입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7:26-27).
교회에도 견고한 기초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교회에 그 기초를 주시면서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마16: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반석’은 누구를 혹은 무엇을 말하고 있겠습니까? 천주교는 여기서의 ‘반석’은 시몬 베드로이고, 그 시몬 베드로를 계승한 교황이야말로 베드로의 ‘적통 후계자’라고 주장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반석’이란 신앙을 고백한 베드로만이 아니라 베드로가 대표하는 사도들 전체를 포함시키거나 혹은 베드로가 고백한 신앙 고백 내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이해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교회를 가리켜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엡2:22)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사도 베드로 자신도 구약성경 세 곳에서 반석과 돌에 대한 말씀을 연이어 인용하면서, 그것을 자기 자신이 아닌 그리스도께 적용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사야 28장에서 말하는 “귀하고 견고한 기촛돌”이고, 시편 118편에서 말한 “머릿돌”이며, 이사야 8장에서 말한 “걸림돌”입니다(벧전2:4-8). 우리는 “교회의 유일한 기초는 주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고백하여야만 하고 이 진리를 가르치기를 주저하지 말아야만 합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