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3:13
“무슨 꿈을 가지고 사는가?” – 사랑을 실천할 꿈을 가지고 살아가야만 한다.
1990년은 반도환경㈜의 이승율 회장은 인생의 전기를 맞이하였다. 먼저 이해에 교회를 처음 출석하기 시작하였으며, 10월 초에 베이징 아시안 게임 기간에는 존경할만한 크리스천 지도자를 한 분 만났다. 이 당시 그는 중국 산둥성 칭다오에서 골프장 사업을 하기 위해 오가던 때였다. 당시 중국에는 골프장이라고 해봐야 베이징과 상하이에 일본인들이 운영하고 있던 두 곳뿐이었다. 칭다오시와의 협상이 농민들 토지보상 문제로 난관에 부닥쳤다. 수소문 끝에 국가주석 양상쿤의 아들 양샤오밍을 만나기 위해 베이징의 한 호텔에 갔다. 그런데 어떤 한국인과 약속이 중복돼 있었기에, 이 회장은 먼저 면담하시라고 양보하고는 옆자리에서 경청했다. 이때 어깨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가 이 회장을 세차게 흔들었다.
“제가 미국에 있는 재산을 팔아 옌지에 기술전문대학을 하나 세우려 합니다. 과학기술 분야 교육을 통해 중국을 돕고 우리 동족을 깨우치는 일에 봉사하고 싶습니다. 나는 크리스천입니다. 내가 하는 일에 협조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귀동냥으로 들으니 그는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 유럽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20년 넘게 생활한 시민권자였다. 대학교수를 지내고 사업도 해서 비교적 크게 성공했다. 그는 1986년 중국사회과학원 초빙교수로 베이징에 와 있는 동안 조선족들이 사는 옌지·지린·창춘·하얼빈 지역을 둘러볼 기회를 가졌는데 여기서 살고 있는 우리 민족이 언어와 민족 문화를 보존하는 것을 보고 감명을 받았으며,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농업학교를 설립·운영했던 선친의 유업을 쫓아 이 지역에 고등교육기관 설립 계획을 갖게 됐다.
이미 그는 1989년 5월 지린성과 옌지시 정부의 협력하에 중외 합작 형태로 ‘옌볜조선족기술전문대학’ (1년 후 옌볜과학기술대로 승격) 설립을 허가받고 학교 부지까지 정해 놓은 상태였다. 당시는 한·중 수교전이라 중국에 외국인이 대학을 세우기 어려운 여건에도 기차로 30여시간 되는 거리인 북경과 연길을 수십차례 오가며 학교 설립을 추진하는 김총장의 열정이 이회장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이 회장에게 비친 그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뭔가를 구하러 온 사람이 아니었다. 돈벌이가 부끄러울 이유는 없었지만 이 회장에겐 그와 같은 멋진 꿈이 없었다. 그 점이 이 회장이 부끄러움을 느끼도록 만들었다. 심지어 비참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이때 이회장의 나이 대략 45세정도였다. 서울에 돌아온 뒤 이 회장은 잠시 자신의 삶의 달음박질을 멈추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나는 무엇을 위해 땀을 흘리고 있는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왜 살고 있는가.’ 그러다 2주 후 서울에 출장 온 김진경 총장을 찾아가 상의한 끝에 대학 설립에 동참하겠다고 말했다. 생애 처음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도 좋다고 느낀 순간이었다고 한다. 김 총장은 서울에서 옌볜과기대 건립후원회를 결성하고 모금 활동에 들어갔으며, 이때 이 회장은 김 총장의 요청으로 남서울교회 당회장실에서 열린 후원기도회에 참석했다. 홍정길 목사를 그때 처음 만났다. 이어 고 옥한흠 목사, 곽선희 목사가 이 일에 깊이 관여했다고 한다. 열심히 추진한 결과 1993년 9월 드디어 정식으로 개교하였고 1995년 7월 전문과 2년제 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국민일보, 이승율의 간증- 연변과기대김진경총장과의 만남).
지금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꿈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웃을 부하게 하여 줄려는 마음이어야만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쫓아야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