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7. 2 – 6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말씀하시고 행하신 구속의 일을 하나님은 ‘단번에hapax’하셨습니다. 이것은 십자가와 관련해 히브리서 저자가 즐겨 쓴 단어입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9:12)
유다서에도 같은 표현을 써서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유1:3)를 말하였습니다. 이렇듯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자신을 드리신 것도 단번에 된 일이고, 믿음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도 단번에 된 일입니다. 이때 우리는 이 말의 뜻을 오해하면 안됩니다.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하는 정도나 그분과의 관계 수준이 완벽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러한 이해나 관계를 가능케 하고자 하나님이 하신 일, 즉 예수님을 통한 그분의 계시와 구속이 완전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배워야 할 것이 아주 많으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계시하신 것 이외에 더 계시하실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인 그리스도 배우기를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29).
우리들의 신앙이 성숙해지고 통찰이 자라나는 것이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단번에 계시하신 영광을 더 많이 깨닫도록 성령께서 우리의 생각을 비춰주심으로 가능합니다. 또 우리는 받을 것이 아주 많으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주신 것 이외에 더 주실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단번에 주신 영적 유업을 더 많이 얻도록 성령께서 우리를 능하게 하시는 대로 우리의 그리스도인다운 성품은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16세기 개혁가들은 오직 성경에만 권위가 있고, 오직 은혜로만 우리가 구원받음을 강조하였습니다. 현대의 복음주의자들 역시 성경과 십자가를 강조하고 그들이 이미 완성되었음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극단적인 보수주의자나 반지성주의자나 간혹 주변에서 말하는 골수분자여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때문이요 그분의 유일무이한 영광과 절대적인 충족성을 하나님을 힘입어 증언하기로 작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분을 증언하는 성경 안에서 하나님의 계시는 완전합니다. 이 완성된 말씀에 우리의 말을 조금이라도 보탠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모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관점입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 1:2).
속죄(贖罪)란 말에서 贖은 ‘속죄할 속’으로 ‘죄를 면하기 위해 바치는 금전’을 뜻합니다. 헬라어나 히브리어의 원뜻은 포로나 노예를 그 주인에게 어떤 대가를 치르고 ‘되사는 일’입니다(출애굽기 21:8). 또 되사서 풀어준다는 의미를 내포하기 때문에 ‘자유를 주다’, ‘해방하다’라는 뜻으로도 쓰이고 있습니다. 이런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적용되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심으로 범죄하여 영원한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다시 사셔서 하나님께 드리셨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완전한 대가의 지불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분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속죄 안에서 하나님의 구속은 완전합니다. 이 완성된 일에 우리의 일을 조금이라도 보탠다면 그것도 그리스도를 모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며, 이는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의 영광이 달린 문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알게 되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아는 것이요, 하나님께 우리가 무엇을 받든 그것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찬송을 돌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7).
모든 건축가와 건설업자는 든든한 기초의 중요성을 잘 압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이 시무하시던 런던의 올 소울즈 교회는 약 2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1822년 건축을 담당한 존 내시라는 분은 옛날에 벽돌 공장이 있던 자리로 추정되는 대지에 하수구와 오수 구덩이가 널려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건축위원들에게 그것을 보고하면서 그는 안전한 기초를 확보하려면 추가로 1만 8,000파운드를 더 들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건축 자금 총액의 10퍼센트에 이르는 금액이었습니다. 그후 150년이 지나 1978년에 이르자 교회 건물은 아름답기는 했지만 펠로우십을 나눌 식당도 없는 등, 여러모로 시대에 맞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때 증축 담당 건축사는 교회 기초를 면밀히 분석한 결과 존 내시가 원래 계획했던 것보다 적어도 90센티미터나 더 깊이 기초를 놓아 전체 교회당 밑으로 지하실을 들여도 될 만큼 깊이가 충분하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건물은 새로운 시대의 수요에 맞도록 개량될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인생을 위하여 좋은 기초를 놓아야만 합니다. 가장 좋은 기초는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생의 본질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건물이 좋아도 기초가 나쁘면 무용지물이 되는 정도가 아니라 위험천만합니다. 영국의 건축사 로버트 포터의 말입니다. “랠프 주교가 치체스터에 지은 성당은 웅장하고 꾸밈없는 로마네스크풍 건물인데 기초 벽이나 하중점이 없이 로마 도시의 잔해 위에 지어졌습니다. 로마 시대와 그 이전 시대의 잔해와 매장물로 이루어진 매립지는 세월이 흘러 짜부라졌고, 급기야 상부 구조물이 붕괴되었습니다. 그래서 1962년에 감독관인 자신이 맨 먼저 한 일은 기초를 보강하는 일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랠프 주교가 기초를 1미터 40센티미터만 더 깊게 팠더라도 그런 일은 불필요했을 것입니다” 건물의 안전성이 다분히 기초에 달려 있듯이 인생의 안전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지럽고 혼란한 세상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여기에 영원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기초)가 있는 성”(히11:10)을 바라보고 살아가야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시고, 이어 승천하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견고한 기초를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주님을, 영혼에 안식을 얻고 인생을 세워 나갈 하나뿐인 견고한 기초로 생각하고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어야만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마태복음 7:2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