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2018. 6. 11 – 15

희열이나 고통, 아름다움이나 경이로움, 선이나 사랑의 순간에 곁으로 지나가시는 그분을 잠깐 보기만 해도 우리는 충만한 초월적 실체에 전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잠깐 보는 것 자체가 바로 일종의 중보입니다. 그것은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달라고 하였을 때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출33:22-23)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하늘과 땅의 영광을 통해, 자연의 오묘한 솜씨를 통해, 고결함과 타락성이 공존하는 인간의 복잡한 상황을 통해, 그리고 그에 대한 우리의 갖가지 반응을 통해 하나님을 선포해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중보가 우리를 만족시켜주지는 못합니다. 그것이 가리켜 보이는 높이와 깊이는 우리가 오를 수도 없고 잴 수도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좀 더 구체적이고 인격적이며 동시에 좀 더 인간적인 중보가 필요합니다. 즉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없이 보거나 느끼거나 생각하거나 짐작한 실체가 아무리 깊다 해도 여전히 하나님은 무한한 타자이신 까닭입니다. 이 타자가 인격적으로 우리 가운데 한 번 오신 적이 있는데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 실제로 인간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을 때였습니다. 오직 그때에만 인간은 인간의 형체를 입은 참된 ‘영광’, 인격적 존재 본연의 광채,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보았던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간격은 지금까지 살펴본 것보다 훨씬 넓습니다. 그것은 반항적인 피조물인 우리와 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 사이에 벌어진 간격입니다. 부끄러운 사실이지만 우리는 창조주를 거역하고 그분의 권위를 거부하고 사랑을 외면한 채 우리의 이기적인 길로 갔습니다. 세상의 많은 고질적인 문제들은 이렇게 인간이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증거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도덕적 순결이 없어졌고, 더 나아가 하나님을 무시하고 외면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중보자는 다른 방법으로는 영영 알 수 없는 그분을 우리에게 인식 가능한 형태로 알리는 정도로는 안되며 훨씬 그 이상이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반항하는 피조물들을 심판하고 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고 재창조하기 위해서 자비의 하나님이 값없이 먼저 와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을 가깝게 보여주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인 것처럼, 우리를 죄악 가운데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주도적인 은혜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것입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

이렇듯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간격을 넘을 수 없습니다. 한편으로는 인간인 우리의 유한성이 있고, 또 한편으로는 이기적으로 반역한 우리의 죄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힘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그분께 이를 수도 없습니다. 우리 쪽에서 놓는 형편없는 작은 다리들은 모두 심연에 떨어지고 맙니다. 다른 방도로는 이을 수 없는 이 간격을 이어주는 다리는 오직 하난뿐이니 곧 반대편에서 놓인 다리입니다. 그 다리는 바로 인간이 되어 우리의 세상에 들어와 우리의 삶을 사시고, 죄 때문에 마땅히 죽어야 할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지만 그 다리는 때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독특한 사역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1-3). 이렇게 우리가 흔히 ‘계시’와 ‘구속’이라 부르는 중보의 두 가지 영역이 그 안에 함께 나타나 있는 것을 히브리서는 증언하고 있는 바, 이 두 가지 영역에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를 통해 무지한 우리에게 말씀하셨고, 우리의 죄를 해결하셨던 것입니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히 1:1-2). 여기서 히브리서 저자는 신약과 구약을 대조하고 있는데, 양쪽의 공통점은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점입니다. 똑같은 동사가 똑같이 부정과거시제로 두 번 등장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표현, 즉 그분이 생각을 말로 표현하셨다는 선언을 우리는 매우 진지하게 대해야 합니다. 우리 인간끼리도 침묵을 지키는 한 서로의 생각을 읽을 수 없습니다. 인간끼리도 말이 오가지 않는 한 피차 이해할 수 없을진대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는다면 오죽하겠습니까? 이사야서 말씀처럼 그분의 생각은 우리 생각과 다르며, 인간이 하나님의 생각을 읽기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의 생각을 알려면 그분이 말씀해주셔야 하고 그 생각에 언어를 입혀주셔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그분이 하신 일입니다. 그분은 구약 시대에는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셨고, 이제 이 마지막 날에는 아들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사실은 신약과 구약이 같을지라도 하나님이 계시하신 시기와 방법과 내용은 다릅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엡2:20).

계시의 시기에 있어, 그분은 ‘옛적에는 조상들에게’ 말씀하셨고 이제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이라는 문구는 오랫동안 기다려온 새 시대가 예수님과 함께 도래했고 따라서 우리는 역사의 마지막 시기에 살고 있다는 사도들의 확신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또 하나님이 이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층과 문화를 초월하여 새로 범세계적인 공동체를 세우셨다는 뜻입니다. 이렇듯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에는 최종적 특성과 보편적 특성이 공존합니다. 계시의 방법에 있어, 하나님은 이스라엘 조상들에게는 선지자들을 통해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신 반면 지금 우리에게는 “아들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에게 영감이 임하는 과정은 굉장히 다양했습니다. 때로는 환상, 꿈, 비몽사몽, 같은 체험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실 때도 있었으나, 그보다는 신탁을 통해 선지자들에게 그리고 그들을 거쳐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한”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아울러 구약성경 전체가 어떤 의미에서 ‘예언’으로 간주된 만큼, 저자들은 역사의 사건을 기록할 때나 시나 잠언 등 지혜 문학을 기록할 때에도 자신들의 예언자적 기능을 십분 발휘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은 “아들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즉 나사렛 예수의 가르침을 통해서 그리고 특히 그분의 인격과 행실을 통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인격과 행실 속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요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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