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6. 4 – 6. 8
1662년 성공회 기도서 개정판의 중심 원리를 설명하는 서문은 다음과 같은 글로 시작합니다. “공예배서가 최초로 편집된 이래로 두 극단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 즉 변화를 완고하게 거부하는 극단과 변화를 너무 쉽게 수긍하는 극단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 영국 성공회의 지혜로 여겨져 왔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 이와 동일한 지헤를 주시며 이를 교회의 사역뿐 아니라 사회, 윤리, 정치 영역에도 적용하는 용기를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변화를 위한 행동을 촉구하는 기독교적인 잔소리꾼들도 필요하고, 우리가 비성경적인 진리와 타협하려고 하면 여지없이 꾸짖는 기독교적 감독관들도 필요합니다. 잔소리꾼과 감독관이 함께 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마음에 맞는 것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잔소리꾼들을 업신여겨서는 안 됩니다. 이 둘은 교회에서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하며, 양쪽 모두 서로의 임무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 집중함으로써 자신들의 역할을 완수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경외하여 진리를 파수하고 교회를 올바르게 세워가는 지혜를 가져야만 합니다.“집은 지혜로 말미암아 건축되고 명철로 말미암아 견고하게 되며 또 방들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각종 귀하고 아름다운 보배로 채우게 되느니라” (잠24:3-4).
우리는 과거를 무시하면 안 되는 것만큼 현재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 그리스도인들과의 연결됨에 관한 문제는 매우 복잡합니다. 성경은 진리 없는 연합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연합 없는 진리 추구 또한 지지하지 않습니다. 독립은 정당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고백하는 공동의 신앙 안에서의 교제 또한 정당합니다. 다시 한 번 우리는 이 문제에 있어서 극단으로 치닫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교회에는 구조와 비구조 형식과 비형식, 권위와 자발성, 독립성과 교제가 모두 필요합니다. 초대교회는 이 문제에 있어서 우리에게 건전한 모범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오순절 직후 성령의 충만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함께 떡을 뗐다는 사실을 읽을 수 있습니다.(행2:46). 초대교회 성도들은 제도적인 교회를 무턱대고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제도적인 교회를 복음에 따라 개혁하기 위해 힘썼습니다. 그들은 가정의 집회로 성전의 형식적인 예배를 보완했습니다. 모든 지역교회는 교회의 형식적인 예배와 가정에서의 형식에 매이지 않는 교제를 함께 시행했습니다. 이 둘의 결합은 매우 건강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 의식을 좋아하는 고전적이며 전통적인 교인들은 가정 예배의 자유스러움을 경험할 필요가 있고, 활기차고 자발적인 참여를 좋아하는 젊은 그리스도인들은 형식을 중시하는 예배의 장엄함과 경외감을 체험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엡 4:3-4).
오늘부터는 존 스토트 목사님의 “내 삶의 주인이신 그리스도” 라는 책을 가지고 함께 묵상해 보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선다 싱은 인도의 시크교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회심 후에 기독교의 순회 전도자가 된 분입니다. 한번은 힌두교 대학에서 비교 종교학을 가르치는 어느 불가지론자 교수가 그에게 시크교에서 얻지 못한 것 중 기독교에서 얻은 것이 있다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선다 싱이 “내게는 그리스도가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자 그 교수는 “그거야 나도 압니다. 이전에 찾지 못한 어떤 특별한 원리나 교리를 찾았느냐 말입니다.” 라고 답답하듯이 말했습니다. 이에 선다 싱은 “내가 찾은 특별한 것은 바로 그리스도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기에 기독교 신앙도 그리스도인의 삶도 그 초점이 예수 당신께 맞추어져야만 비로서 진정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묵상을 통하여 그리스도께 초점을 둔 믿음과 삶은 어떤 것이지 그 본연의 의미를 탐색하면서, 어떻게 우리가 그분과의 관계를 가꾸어갈 것인가를, 어떻게 하면 그분이 우리 삶의 중심을 차지하시도록 할 것인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벧후 3:18).
교회 예배에 처음 참석하는 사람은 누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드리는 기도의 틀에 놀라게 됩니다. 거의 모든 기도가 “전능하신 하나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께 바쳐지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즉 ‘그리스도를 통해서’라는 이 보편화된 기도 공식은 우리를 ‘중보’라는 개념으로 이끌게 됩니다. 이것은 성부 하나님이 인류를 향한 활동들을 직접 취하시지 않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간접적으로 취하시며,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야 함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의문이 듭니다. 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활동하셔야만 하고, 우리는 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기도해야만 하는가?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타락한 인류 사이를 잇는 유일한 다리이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세대의 모든 교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온 한 가지 근본적인 확신이 있습니다. 인간은 오직 “우리 구주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고 그분께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중보이신 그리스도에 관하여 우리는 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2:5).
하나님와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간격이 얼마나 넓은지 알아야만 비로소 우리는 우리 자신이 놓는 다리들로는 안되며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함을 인정할 수 있게 됩니다. 우선, 유한한 피조물인 우리와 무한한 창조주이신 하나님 사이의 간격을 생각보겠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의 관계는 차이보다는 유사성의 관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우리의 사고력을 통해 그분의 합리성을, 우리의 사랑을 통해 그분의 사랑을, 우리의 양심에 새겨진 도덕을 통해 그분의 거룩함을 조금이나마 지각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 무한자와 유한자 사이의 간격은 남아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육체를 가진 인간이 볼 수 없는 영적인 존재이기에 모습도 없으시고 처음부터 인격적으로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창조된 모든 것들이 그분의 상상력의 발현일 뿐입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물을 통해 간접적으로만 그분을 인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작은 머리로는 그분을 담기는 고사하고 그분을 생각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해야만 하며, 이런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우리의 예배의 시작입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사55: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