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유대교의 기성 체제를 주저하지 않고 날카롭게 비판하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지 못하였기 때문만 아니라 자신들의 전통에 지나치게 집착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보고 바로 순종하기 위해 수 세기 동안 전해 내려온 전통들(장로들의 유전)을 과감하게 버리셨습니다 (막 7:1-13). 또한 주님은 사회적 인습을 폐지하는 데도 거침없으셨으며, 일반적으로 멸시를 받던 계층들에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허용되지 않던 여인들과의 공적인 대화도 서슴지 않으셨습니다. 이 당시 로마 사회에서는 원하지 않는 아이는 버려도 되는 하찮은 존재였고, 제자들 역시 성가신 존재로 생각한 어린아이였지만, 주님은 그들을 사랑하사 가까이 하셨습니다. 그분은 몸을 파는 여자들이 자신의 몸을 만지는 것을 그냥 두셨습니다. 이런 모습은 바리새인들이 기겁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분은 유대인들이 가까이 오는 것을 막기 위해 돌을 던진 나병환자를 만지셔서 고쳐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여러 방식으로 인간의 관습을 거부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그분의 마음과 양심을 매어 두셨습니다. 주님은 성경에 대해서는 보수주의적이면서도 다른 것들을 성경적으로 철저하게 비평하는 데 있어서는 급진적으로 되심으로 보수와 진보를 독특하게 결합시키셨습니다.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전 7:18).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제자는 스승보다 낫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진보와 보수를 결합하셨다면 그분을 따르는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니, 그분에게 충성하려면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교회에 더 많은 급진적 보수주의자들(Radical Conservatives)이 생겨나기를 바란다”라는 말로 요약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변화시켜야 할 것과 지켜야만 할 것을 비판적으로 분별할 줄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레이튼 포드는 미니애폴리스에서 열린 미국 복음화 대회에서 다음과 같은 말한 것은 이 필요성을 잘 인식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17세기의 영어나 18세기의 찬송가, 19세기의 건축물이나 20세기의 상투적인 문구 같은 것들에 얽매이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결코 변하지 않으시며 그분의 계시 또한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언제나 움직이시며 자신의 백성을 새롭고 모험으로 가득 찬 삶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12:3).
오늘날 기독교는 이 시대의 문화에 길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이에 대하여 비판적 분별력을 가져야만 합니다. 성경은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문화는 교회의 전통과 사회적 관습, 예술적 창조물의 혼합체일 뿐입니다. 문화가 가질 수 있는 “권위”란 기껏해야 교회와 공동체로부터 파생된 것입니다. 그것은 개혁 또는 비평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문화는 시대나 장소에 따라 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아래에서 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문화를 성경적인 잣대로 끊임없이 비판해야 합니다. 우리는 문화적 변화에 분노하거나 저항할 것이 아니라, 이런 변화가 인간의 존엄성을 더 진실되게 표현하고 우리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하기 위해 급진적인 변화를 제안하고 개혁하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우리는 만약 우리가 교회나 사회에서 어떤 변화를 거부하려고 할 때, 우리가 변호하려는 것이 성경이 아니라 교회 전통이나 문화적인 유산은 아닌지 질문해야 합니다. 이는 모든 전통이 그저 전통이기 때문에 무조건 버려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전통을 무비판적으로 배척하려는 사상은 전통을 무조건 수용하려는 태도만큼이나 어리석은 생각이며 때로는 위험합니다. 그러므로 전통 역시 성경의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인식을 가져야만 합니다. 반면에 우리가 변화를 원할 때 우리가 반대하려는 것이 성경인지 아니면 개혁되어야 할 전통인지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고, 또 인정하는 것보다 자주 성경에만 속하는 권위와 진리 그리고 영원성을 우리의 문화나 관습에 부여하곤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들에게 안정감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마치 사람들의 사사로운 의견이나 전통 같은 것으로 여겨 가볍게 취급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세속적인 세상의 반권위주의를 지나치게 수용한 나머지 하나님의 권위와 자신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까지 거부해 스스로 세속적인 모습을 보이곤 한다는 사실을 조심하여야만 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음으로 기업을 삼아도 슬기로운 자는 지식으로 면류관을 삼느니라”(잠14:18).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팽팽한 줄 위를 걷도록 요청받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무조건 변화를 거부해서도 안되며, 변화를 무조건적으로 지지해서도 안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허락된 자유를 이용해 무분별한 전통파괴주의자가 되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으며, 교회 역사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役事)임을 믿는 그리스도인에게 변화를 위한 변화를 좋아해서도 안된다고 가르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듯이 “묵은 것이 좋을” 때도 있습니다(눅5:39). 그것은 시간의 시련을 견뎌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또한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이 지켜온 것에 대해서도 민감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은 변화에 쉽게 적응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변화에 의해 쉽게 상처를 받고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적 관점에 비추어 지혜롭게 분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만 우리는 교회와 사회의 모든 문화에 과감한 성경적 비판을 적용할 수 있으며, 우리가 믿는 하나님 안에서 더 나은 변화를 추구할 수 있게 됩니다. “어리석은 자는 온갖 말을 믿으나 슬기로운 자는 자기의 행동을 삼가느니라”(잠1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