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5. 21 -25
지성과 사랑 둘 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성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지성과 감정 모두 본래적 인간의 경험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진리만큼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진리는 차가운 것도 아니며 메마른 것도 아닙니다. 진리는 오히려 따듯하고 열정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새로운 비전이 우리에게 열리게 되면 우리는 그저 바라 보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후회하거나 분노하거나 사랑하거나 경배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반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첫 번째 부활절 오후 엠마오를 향해 가던 두 제자를 생각해보십시오. 부활하신 주님이 그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사라지자 그 두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눅 24:32). 그 두 제자는 그날 오후에 자신들이 경험했던 느낌을 마음이 뜨거워졌다라고 표현했습니다. 두 제자의 마음을 영적으로 뜨겁게 만들었던 원인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성경을 풀어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그리스도께서 성경을 우리에게 풀어주시면, 우리는 그 속에 있는 새로운 진리를 알게 되어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지게 됩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시편119:18)
F.W. 파머는 “심오한 신학은 경건에 불을 붙이는 가장 좋은 연료이다. 심오한 신학은 쉽게 불을 지피며 한 번 붙으면 오랫동안 타오른다”라고 말합니다. 지성과 감정의 진정한 결합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것에서뿐만 아니라 설교 안에서도 일어납니다. 이 점을 마틴 로이드 존스 박사보다 잘 표현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 박사는 설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놀라운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설교란 무엇인가? 그것은 불붙는 논리이다! 웅변적인 이성이다! 이것이 모순처럼 들리는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진리와 연관되어 있는 이 이성은 사도 바울과 다른 사람들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매우 강력한 웅변이다. 설교는 불붙은 신학이다. 불을 붙이지 못하는 신학은 무엇이 부족한 신학이거나 적어도 신학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설교란 불붙은 사람을 통해 나오는 신학이다’ 우리가 시험에 합격하여 합격통지서를 받거나, 원하던 회사에 입사통지서를 받으면 자연히 마음이 기뻐집니다. 그러므로 지성과 감정의 올바른 관계란 먼저 지성을 통해 진리를 깨닫고 나면 감정은 자연히 이를 따라나오게 됩니다. 그 결과 우리가 ‘믿음의 삶’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반드시 지성과 감정 더나가 의지의 요소가 전부 들어가 있습니다. 지성을 통하여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고 나면, 회개 및 감사라는 감정의 요소가 출현하고, 이어 이 회개와 감사를 기반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가 생기는 것입니다. “주의 규례들을 항상 사모함으로 내 마음이 상하나이다”(시편 119:20).
존 스토트 목사님이 살아 생전에 스웨덴의 웁살라에서 열렸던 세계교회협의회 총회에 고문 자격으로 참석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그곳에 도착해서 신문을 보다가 그 신문이 그곳에 참석한 사람들을 즉각 몇가지 부류들로 분류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약간 경멸하는 투로 보수주의자나 수구주의자, 현상유지자, 고리타분한 전통주의자, 열렬히 환영하는 개혁적이고 혁명적인 진보주의자 등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구분입니다. 왜냐하면 균형잡힌 그리스도인이라면 양쪽 진영 모두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현대 교회에 불필요한 두 번째 양극화는 보수와 진보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보주주의자라 하면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보존하고 유지하려는 사람들을 말하며, 반면에 진보주의자는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에 반기를 들고 급진적인 변화를 원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보수적이면서도 진보적이어야만 하며 이 둘 사이에 균형을 잡을 줄 알아야 합니다. 먼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하나의 영원한 복음을 충실하게 수호하는데 진력한다는 의미에서 보수적이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신약성경에 보존된 그리스도에 대한 사도들의 증거로 이미 완성된 것이며, 이것은 진리나 권위에 있어서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임무는 새로운 복음, 새로운 신학, 새로운 윤리, 새로운 기독교를 계속해서 만들어 내는데 있지 않고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힘써 지켜야만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유다 3절)
“연합하여 성장하다”(Growing into Union)의 저자들은 복음의 진리를 파수해야만 하는 의미를 다음과 같이 강력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첫 번째 임무는 복음을 있는 그대로 보수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명을 맡은 사람들을 보수주의자라기보다는 보존주의자라고 불러야 한다. 왜냐하면 보주주의자란 말은 오래된 것의 고통스러움에 중독되어 새로운 사상을 무조건적으로 거부한다는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다. 수구주의와 몽매주의는 그리스도인들의 사고에서 나온 악덕이지만 보존주의는 그리스도인들의 사고에서 나온 미덕이다.” 그러나 자신들의 보수주의를 복음의 진리를 파수하는 부분을 넘어 모든 것에 기존질서를 지키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기질상 보수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정치나 사회를 보는 시각이나 자신들의 삶의 양식, 패션 스타일, 헤어 스타일, 수염 모양 등 갖가지 것들에 대해 보수적인 견해를 갖습니다. 그들은 단지 시대에 뒤떨어진 것 정도가 아니라 콘크리트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온갖 변화를 금기시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 사람들은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 반면 진보적인 사람들은 세상이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기존의 질서에 불편한 질문을 던짐으로 보수주의자와 충돌을 빚게 마련입니다. 사실 진보주의자들은 변화를 불가피한 것으로 여기며, 변화를 환영하며, 변화에 적응하며, 심지어 변화를 이끌기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이 둘은 서로 반대되고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대립이 불가피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
얼핏 보기에 보수적인 사람들과 진보적인 사람들은 서로 반대될 뿐 아니라 때로는 극단적으로 대립한다고 보여집니다. 그러나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비록 차원이 다르기는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나 보수주의자이면서 동시에 진보주의자였습니다. 성경을 대하는 그분의 태도는 분명히 보수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요10:35),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5:17-18)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유대 지도자들을 향해 그들이 구약성경을 무시하고 성경의 신적 권위에 진정으로 순종하지 않는다고 신랄하게 질타하셨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도덕법의 정수가 들어있는 십계명을 지키지 않는 지도자들을 질책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바리새인들은 전통으로 내려온 고르반 제도를 악용하여 부모님을 공경하라는 계명을 회피하는데 줄곧 사용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부모님께 드릴 것이 고르반, 즉 하나님께 드렸다하면 그만이었고, 물질이 필요한 부모님께 더 이상 아무것도 해드리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데는 그 어느 누구보다 보수적인 입장에서 주님과 같은 태도를 가져야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명과 상관없는 혹은 충돌되는 사회적 제도와 인습에 대하여는 진보주의자였습니다. “내 마음을 주의 증거들에게 향하게 하시고 탐욕으로 향하지 말게 하소서”(시편119: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