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5. 14-18
리처드 닉슨이 1968년 대통령 선거에 나설 때 자신이 1960년 존 F. 케네디와의 대통령 선거전에서 패배한 것이 케네디가 텔레비전에서 훨씬 좋은 이미지를 얻었기 때문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마샬 맥루한을 불러 자문을 구했더니 그는 “선거란 이슈가 아니라 이미지 싸움”이라고 강조하여 칙칙한 변호사 이미지를 따뜻하고 활력있는 이미지로 바꾸도록 하였고 그 결과는 승리였습니다. 그러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정치적 책임을 포기한 채 주요 정책에 대한 토론보다 자신의 느낌에 따라 후보를 결정하고 투표하는 것은 매우 걱정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반지성주의는 교회 안에서 훨씬 더 심각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이성이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의 일부라고 말합니다. 우리를 이성적인 존재로 만드시고 우리에게 합리적인 계시를 주신 하나님은 이성적인 분이십니다. 따라서 이성을 부인하는 것은 인간성을 부인하는 것이며 인간 이하의 존재가 되겠다는 것과 다름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무지한” 말이나 노새처럼 행동하지 말고 지혜에 있어서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시32:9). 사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지성을 사용하지 않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서신서에서 늘 지혜와 모든 총명으로 가득차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1:9-11)
많은 사람들이 신앙은 이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신앙과 이성을 결코 양립할 수 없는 대립적인 개념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앙은 우리가 지성을 활용할 때 더욱 성장한다고 말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시편9:10).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하나님의 성품이 신뢰할 만하다는 지식으로부터 나옵니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사26:3 – 심지: ‘생각들이 고정되어 있다’는 의미). 이 구절은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과 하나님을 향해 지성을 고정시키는 것을 같은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온전한 평강은 하나님을 아는 것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지성을 이처럼 강조하고 있는 것을 미루어 볼 때, 감정을 중시하는 반지성주의에 대해 우리는 무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들이 자신을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스스로 말하고 있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습니다. “세속주의”는 술이나 담배, 춤이나 화장, 영화나 미니스커트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시대정신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풍조(실존주의를 포함)를 분별력 없이 흡수하고 성경의 엄격한 기준에 따라 비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미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12:2).
지난 주에 언급했습니다만, 존 웨슬리 선생이 초창기에 어떤 비평가에게 한 말을 다시 한 번 인용하겠습니다. “이성을 거부하는 것은 기독교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와 이성은 함께하는 것이며 모든 비이성적인 기독교는 거짓된 기독교라는 것이 근본적인 원리입니다.” 그러나 반지성주의가 위험스러운 것만큼 그 반대편의 근단으로 치우치는 것 또한 위험하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메마르고 생명력 없는 초지성주의, 곧 정통에 대한 배타적인 집착은 신약성경이 말하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체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말하는 사도 바울(빌3:8)과 그리스도인들이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한다는 사도 베드로(벧전1:8)의 말을 생각하면, 그리스도인이 우울하거나 감정이 메마른 사람들이었다는 비난은 당치 않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를 이성적인 존재로 만드셨던 것만큼 감성적인 존재로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우리는 그저 따뜻한 피를 가진 포유류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사랑과 분노, 연민과 슬픔, 경외감을 깊이 느낄 줄 아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것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둘 모두를 붙잡고 균형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그런 삶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을 때 이룩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4:15)
우리는 자라날 때 남자는 여자나 어린아이들과는 달리 다른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말을 많이 듣고 자라납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 역시 학창 시절에 그런 가르침 가운데 자라났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을 읽어보면 예수님이 자신의 감정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표현하셨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신약성경은 예수님이 두 번이나 많은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셨다는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한 번은 사랑하는 나사로의 무덤가에서, 그리고 다른 한 번은 멸망이 임박한 예루살렘 성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지성을 부인하는 것만큼 우리의 감성을 부인하는 것 또한 매우 위험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을 부인하려고 합니다. 이미 1970년에 출간되어 고전의 반열에 오른 앨빈 토플러의 책 “미래의 충격”에는 크레타 섬의 작은 해변에 위치한 마을에는 40-50개 정도의 동굴이 있는데, 그 동굴에는 급변하는 현대생활에 지쳐 그곳으로 도망쳐 은둔하고 있는 젊은이들로 가득차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에게 한 기자가 로버트 케네디 상원 의원이 암살(1968년6월5일)되었다고 전해주자 그 젊은이들의 반응은 침묵뿐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현상은 오늘날에도 같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디에도 개입하려 하지 않거나 어떤 것에도 흥미를 느끼지 않는 사람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감정은 어디로 사라져 버렸을까요? 만약 우리가 정서적으로 무감각한 상태로 방치된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타인의 처지를 공감할 수없기 때문입니다. 공감할 수 있는 능력 이것은 감성이 우리에게 부여하는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입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엡5:19-21)
존 스토트 목사님은 다음과 같은 경험을 전하고 있습니다. “…헨델의 메시아 연주를 관람하면서 했던 경험입니다. 헨델의 오라토리오의 합창 할렐루야가 ‘또 주가 길이 다스리시네… 왕의 왕(할렐루야) 또 주의 주(할렐루야)’로 절정에 이르고 아멘으로 장엄하게 대미가 장식되었을 때 저는 전율하는 감동을 느꼈습니다. 그렇게 합창이 끝나자 청중들은 모두 일어나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것은 지휘자와 합창단, 오케스트라와 솔리스트에게 찬사를 보내는 가장 합당한 방법입니다. 그러나 박수를 다 치고 나서 사람들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모자와 외투를 집어들고는 웃고 떠들면서 연주회장을 빠져나갔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자리를 그렇게 쉽게 떠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건방진 것일까요? 저는 천국에, 영원 속에 그리고 위대한 왕이신 그분의 임재 안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저 오케스트라에 박수를 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머리를 숙여 하나님을 경배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지금 감정주의에 호소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감정주의란 인위적이고 과장된 가식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감정이란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어떤 느낌 같은 것으로 억제할 것이 아니라 당연히 표출되어야 하는 정당한 표현입니다.” 그러면 지성과 감성 사이의 올바른 관계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3-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