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2018 5 7 -11

오늘부터는 “균형잡힌 기독교 Balanced Christianity”(존 스토트)를 가지고 묵상해 보는 기회들을 갖겠습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직면한 커다란 비극 중 하나는 “양극화”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과 동일한 하나님이시지만 우리를 위해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그분의 동정녀 탄생과 성육신, 권위 있는 가르침과 대속적 죽음, 부활의 역사성과 다시 오심을 믿습니다. 또한 우리는 성령님을 믿으며, 성경이 성령님의 특별한 영감으로 기록된 것과 성령님의 특별한 은혜로 거듭나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으며,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고, 교회의 지체가 되어 세상을 섬기도록 보냄 받은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 교리와 다른 위대한 성경적 교리들 위에 견고히 굳게 그리고 함께 서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의 직분과 목회 사역, 침례의 자격, 교회와 국가의 관계, 은사의 수용 등 중요하지 않은 문제로 분열되어 있습니다. 경건하면서도 성경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한 문제들이 분명 존재하는데 종교개혁자들은 이런 문제들을 아디아포라, 즉 “중요하지 않은 문제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성령님의 조명을 따라 성경에서 얻은 확신을 관철시키고 싶겠지만 서로 사랑과 존경으로 각자의 자유를 인정해야 합니다. 이를 위한 좋은 해결책이 있습니다.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 모든 것에 사랑을”(리처드 박스터).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기독교인들은 중요하지 않은 문제로 분열하기도 하지만 기질의 차이 때문에도 분열합니다. 하나님은 다양함을 기뻐하신다는 사실과 그분이 사람들의 유형과 기질, 개성을 다양하게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종종 잊어버리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질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신학에 더 많은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성경 진리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성령님의 조명에 의존해 있기는 하지만 우리의 성향과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 그리고 우리가 속해 있는 문화에 필연적으로 영향을 받습니다. 타고난 성향과 후천적 교육에 따라 어떤 사람은 감성적인 면보다는 지성적인 면이 우월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지성적인 면보다는 감성적인 면이 강하게 나타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변화를 싫어하고 그런 변화에 위협을 느끼는 반면 다른 사람은 천편일률적인 것을 싦어하여 변화를 선호하기도 합니다. 이런 문제들은 근본적으로 기질 차이에서 생기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기질이 우리 자신을 통제하도록 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성경이 우리의 천성적인 기질을 판단하고 통제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은 균형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신앙 생활을 하는데 균형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매우 경계하여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공중에서 외줄타기를 할 때 균형을 잃는다는 것은 곧 떨어져 죽거나 크게 부상을 당한다는 의미인 것과 같이, 기독교인들이 믿음생활에서 균형을 잃는다는 것은 바른 믿음에서 이탈하게 됨으로 자신의 삶 뿐만 아니라 타인의 삶에도 매우 좋지않은 영향을 미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

그리스도인들 특히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자주 발견되는 가장 큰 약점이 극단적이 되거나 균형을 잃어버리는 경향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균형을 잃어버리게 하는 것보다 사탄이 더 좋아하는 취미는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사탄과 사탄의 전략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균형을 잃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사탄이 가장 좋아하는 전략이라고 확신합니다. 우리는 사탄이 균형잡는 것을 싫어하는 것만큼 균형감에 애정을 가져야 하며, 사탄이 이를 방해하기 위해 힘쓰는 것만큼 균형감을 증진시키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리의 어느 한쪽 끝에만 머물기를 좋아하는 성향이 있어 다른 사람을 한쪽 극단으로 밀어내고 자신은 그 반대편에 서려고만 합니다. 더 나아가 코끼리의 귀를 만진 장님이 코끼리는 부채와 같이 생겼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이 어느 한 면의 진리를 가지고 모든 상황을 통일적으로 설명하기를 좋아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양극단을 동시에 볼 수 있다면, 성경에 근거한 건전한 균형감을 보여줄 수 있을 것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23:23)

1825년 경에 영국의 찰스 시므온 목사님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형제여, 내가 전에 아리스토텔레스의 글을 읽었을 때 나는 정말 그를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글을 읽은 후로는 나는 그의 생각에 완전히 사로잡혀버렸습니다. 양쪽 모두를 두루 아우르는(중심 없이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생각에 말입니다. 어떤 때 나는 강경한 칼빈주의자(하나님의 주권을 인간의 선택보다 강조)가 되었다가도, 어떤 때에는 유연한 알미니우스주의자(인간의 선택을 하나님의 주권보다 강조)가 되기도 합니다. 만약 당신이 극단을 좋아한다면 내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기억해주길 바랍니다. 우리가 가야 할 곳은 한쪽 극단이 아니라 양쪽 극단입니다.” 당연히 상황에 따라 가장 성서적인 태도를 취하라는 뜻으로서, 공자가 “집기양단 執其兩端”이라고 중용에서 가르친 말과 비슷합니다. 즉, 양 극단을 파악한 뒤 합리적으로 행동하라는 의미입니다. 존 웨슬리 선생은 초창기에 어떤 비평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성을 거부하는 것은 기독교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와 이성은 함께하는 것이며 모든 비이성적인 기독교는 거짓된 기독교라는 것이 근본적인 원리입니다.” 이말을 염두에 두고 지성과 감성의 문제부터 균형을 잡는 법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 (전7:18).

그리스도인들이 쉽사리 빠지는 양극화의 첫번째는 지성과 감성에 관한 것입니다. 너무 차가울 정도로 지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인간은 고사하고 동물의 피가 흐르는지조차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그런가 하면 너무 감정적이어서 지적인 기능이 있는지 의심스러운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두 극단 중에 반지성주의, 즉 감정주의에 사로잡히는 것이 더 큰 위험을 갖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전도 설교에서 볼 수 있는데, 이런 설교는 순전히 감정적인 결단에 호소할 뿐 사도들이 했던 것처럼 복음을 선포하거나 성경을 근거로 이성을 가지고 사람들과 씨름하지 않습니다. 이런 경향은 생생하고 직접적이며 감정적인 경험을 요구하는 현대인들의 욕구 속에서, 그리고 경험을 진리의 표준으로 떠받드는 것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이 들은 어느 젊은이들 사이의 대화입니다. “내가 어떤 교리를 믿는 것은 그 교리가 성경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교리가 진정성 있는 존재로 내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교회에 가는 것이나 성경을 읽는 것, 기도하는 것도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의무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일들을 하고 싶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에 행하는 것이다”

이런 경향은 세속적인 실존주의가 어중간하게 기독교화된 것으로 매우 염려스러운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진리가 언제나 경험의 표준이 되어야만 합니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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