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2018.4.30 -5.4

어떤 잘 알려진 목사님은 젊었을 때 큰 아이가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하여 자주 야단치고 때로는 때렸다고 합니다. 한 번은 화가 나서 큰 아이의 따귀를 때렸는데 얼굴에 손자국이 난 상태로 아파트를 나가다가 여러 교회분들을 만나게 되어 그분들이 “네 얼굴에 왜 손자국이 난 것이냐? 누가 때렸니?” 하면 “아버지가 때렸어요!” 하고 다님으로 망신을 당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던 자기가 나이가 들어서 변했다고 한 말이 30년 전인데 그 후 그 큰 아들은 장성함에 따라 큰 사고를 치고 가정과 교회를 불명예스럽게 만들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한 사례를 알고 있습니다. 그 가정은 가정 예배도 열심히 드렸습니다. 그러나 아이들 모두 잘 키워내지를 못하였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하고 지금 생각해 보면 목사님 부부가 자녀들의 모범이 되는 생활을 못하였기 때문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살인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중요하게 여기고 지키지만 자녀를 말씀으로 가르치고 교육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등한히 할 때가 많습니다. 자녀들에게 모범을 보이지 못한 상태에서 야단치며 매질만 하는 것은 교육이 아닙니다. 그것은 학대입니다. 징계가 바로 되기 위해서는 훈계가 따라야 합니다. 훈계가 있을 때 징계가 바로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훈계를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아니할 부모로서의 자격을 갖추어야만 하는데, 당연히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가려는 결단이 먼저 서 있어야만 합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엡 6:4).

우리가 자녀를 키우면서 조심해야 할 것은 별다른 이유없이 아이를 야단치는 것입니다. 특히 부모의 변덕스런 성격으로 인해서 자녀에게 매를 댄다든지 꾸중을 하면 그 자녀의 마음에 원한이 생깁니다. 어머니가 어제만 해도 사랑스럽다고 뽀뽀를 해 주셨는데 오늘은 큰 이유도 없이 야단을 친다면 자녀의 마음은 갈피를 잡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엄한 가정보다 일관성이 없는 가정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어머니들은 남편때문에 기분 상한것을 자녀에게 푸는 실수를 절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녀들은 굉장히 예민하게 봅니다. 자녀들의 눈앞에서 부모가 인격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부모로 비친 경우 자녀를 엄하게 다루면 다룰수록 그 자녀의 마음에는 더욱 분노가 치솟는 것입니다. 옥한흠 목사님의 부친은 몹시 엄한 분이라 어렸을 때 많이 맞았다고 합니다. 대다수의 경우 잘못을 하였기 때문에 매를 맞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어떤 때는 아버지가 왜 그러셨는지 도무지 이유를 알지 못한 채로 매를 맞은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목사님은 굉장히 분하고 얼마나 화가 났는지 순간적으로 아버지가 빨리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녀가 잘못했을 때는 반드시 자녀의 잘못을 납득시킨 다음에 징벌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자녀에게 무조건 매를 댄다면 자녀가 원한을 갖게 됩니다. 이런 잘못된 행동을 미리 제어하는 방법은 부모님들이 자녀들을 양육하는 목적을 확실히 정해 놓는 것입니다. 그 목적은 말할 것도 없이 주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잠15:33).

자녀는 하나님의 필요에 의하여 그분이 세상에 보내주신 하나의 인격체이자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부모는 단지 자녀를 맡아서 하나님의 명령대로 양육해 주는 책임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녀의 인격을 존중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손은 자녀에게 사랑의 표현을 하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손이 자녀를 안아주고 쓰다듬어 주어 사랑을 표현하는 대신 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마구 때리는 것은 부모로서 몰상식한 태도입니다. 예로부터 양식이 있는 부모는 손으로 때리지 않습니다. 회초리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왜 맞아야 하는가를 설명하고 맞아도 좋다는 자녀의 동의를 받은 후 때립니다. 그래야 자녀의 마음에 노여움이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제임스 돕슨의 책에 실린 에피소드는 좋은 예를 제공합니다. 어떤 부부가 자녀를 데리고 외식하기 위해 식당을 가서 음식을 기다리는 중에 다섯 살 난 아이가 고함을 치고 물을 쏟으면서 장난을 쳤기에 아빠가 타이르기를 4번이나 하였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급기야 아빠는 그 아이를 데리고 주차장의 자기 차 옆으로 데리고 나가 왜 맞아야 하는지 아이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아이는 “예” 하고 종아리를 맞기를 동의하였습니다. 아이는 종아리를 맞는 동안 아파서 팔짝 팔짝 뒤면서 울었습니다. 그러자 마침 그 주변을 지나가는 여인이 아동 학대라고 경찰을 부르겠다고 하니 매를 맞던 아이가 갑자기 울음을 그치고는 “아빠 저 아줌마가 왜 그러는거야?” 하면서 이상하게 쳐다보았습니다. 아이는 자신이 맞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잠언22:6).

손봉호 교수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가장 시급히 필요한 것은 논리적인 이론도 아니고 지당한 말씀만 내뱉는 설교자도 아니며, 스스로는 실천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에게만 요구하는 거짓 지성도 아니다. 자신의 욕망을 조금이라도 더 억제하면서 다른 사람의 동참을 유도할 수 있는 도덕적 엘리트가 물질문화의 소외를 극복하고 인간성을 회복하는데 진정 공헌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논지를 전개한 적이 있습니다(인간성 회복, 162). 꼭 그리스도인을 지칭한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 자녀가 바로 자라나지 못한다면 한국의 장래는 너무 암담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인 부모의 사명이 막중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자녀를 잘 교육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잘 교육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토대로 균형있는 가정 생활을 유지하여 자녀들에게 모범을 보여주어야만 합니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삶을 살도록 애를 쓰는 동시에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도록 주님께 기도하여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의 도우심 없이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부인의 삶을 인도하시어 사랑의 열매를 맺게하시는 성령님의 존재는 기독교와 타 종교와의 결정적인 차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단정하게 옷을 입으며 소박함과 정절로써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딤전2:8-10).

신약에 나오는 아름다운 효도 이야기는 바로 예수님이 보여주신 효도입니다. 예수님의 양아버지인 요셉은 그리 장수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학자들은 그가 일찍 세상을 떠났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12살 때 마지막으로 언급되고 그후로는 예수님의 가족 이야기에는 늘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가정의 모든 책임은 맏아들인 예수님께로 넘어왔을 것입니다. 이런 연유로 예수님은 30세가 될 때까지 목수로서 가족을 부양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성심껏 어머니와 동생들을 돌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한 후부터 3년 6개월 동안 가정을 떠나게 되어 가족을 부양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은 항상 어머니에 대한 자식의 의무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 19장에 보면 십자가 위에 달리신 채 그 고통 중에도 아래에 계신 어머니 마리아와 제자 요한을 보시고 먼저 어머니 마리아에게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요한에게는 “아들아 보라 네 어머니이니라” 하시자 그때부터 사도 요한이 어머니를 자신의 집에 모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요19:26, 27). 사실 요한의 아버지 세배대는 잘사는 집이었으며, 세배대의 부인이자 요한의 어머니는 마리아의 동생이었습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보아 예수님의 가정에 동생들이 있기는 했지만 어머니를 부양할 만한 처지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만유의 주님이신 예수님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천사를 보내어 시중들게 하거나 기적을 일으켜 여생을 편히 살도록 하시지 않고 그 당시 형편과 관습을 따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효도의 면에서도 우리의 모범이신 예수님을 따라 우리의 처지를 감안하여 최대한 공경하여야 하겠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출 20:12)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