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터예배

요한복음 12:23-26

조세핀 캠벨은 1852년 미국에서 태어나 1920년 한국에서 죽어 양화진에 묻힌 독신 여선교사입니다. 이분은 27살에 남편과 사별하고 두 자녀도 병으로 잃자 다른 사람을 위해 일생을 헌신하기로 결단하고 시카고의 간호학교에서 수련하였습니다. 그리고 33세에 중국 선교사로 나가서 상해와 소주에서 10년 동안 선교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중국 선교사로 일하면서 익숙해졌을 무렵 조선의 수도 서울에서 여학교가 필요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캠벨 선교사는 45세의 나이였으나 이에 다시 결단하여 1897년서울에 남감리화 최초의 여성 선교사로 파송되어 한국에 왔고 이어 1898년 10월 고간동(현 내자동)에 세운 학교가 배화여고입니다. 배화여고의 처음 이름은 캐롤라이나 지역 주일학교 학생들의 정성을 기려 캐롤라이나 학당이라 하였고 1903년 학부의 인가를 받으면서 윤치호가 ‘배화’ 란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기숙학교로서 6명의 학생을 받아들여 가르쳤습니다. 이 학교는 학생들을 기숙사에 수용하고 24시간 신앙 교육이 가능하였습니다. 한국인들도 반응이 좋았습니다. 공짜로 재워 주고, 먹여 주고, 입혀 주고, 가르쳐 준다니까 가난한 집 아이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 결과 개교 1년 만에 학생이 20명으로 늘어 1900년 봄 2층짜리 벽돌 건물 두 채를 지어 교사와 선교사 주택으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1912년 세브란스 병원 에비슨 원장이 결핵균 등의 감염을 우려하여 새 교사로 이전할 것을 강력히 권고함으로 ‘고간동 선교부 시대’를 15년 만에 막을 내리고(현재는 서울시 경찰청사 앞마다임) 옮겨 간 곳이 필운동입니다. 필운동에 있는 필운대 바로 아래는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운 권율 장군이 살았으며, 맏 사위 백사 이항복에게 집을 물려주고 행촌동으로 옮겨간 곳입니다. 배화 여학교와 남감리회 여선교부가 옮겨 간 곳이 바로 이항복의 생가가 있던 필운대 아래 누하동 149번지였습니다. 1915년 1월 이곳 4000여평의 부지에 160여 평 규모의 2층 벽돌 건물을 짓고 학교를 옮겼습니다. 배화 여고는 민족운동가 남궁억 선생이 여학생들에게 조선역사, 한글 서예, 무궁화 수예를 가르쳤으며, 미국 유학을 다녀온 개화여성 차미리사가 민주 민족주의 교육을 실시하였습니다. 그 결과는 3.1운동 때 나타나 배화 학생 배화 여고 교사 들이 선언서를 시내에 배포하였으며, 3.1운동 1주년을 맞아 1920년 3.1일 새벽 기숙사에 있던 학생 40여명이 필운대 언덕에 올라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가 구속되었고 1달만에 집행유예로 석방된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만세운동 후 배화의 인기는 더 올라가 학생 수가 400명을 넘었습니다. 한편, 배화 여고를 세운 선교사 조세핀 캠벨은 1918년 안식년을 가서 병을 치료하다가 3.1운동 소식을 듣고 조선이 자신이 묻힐 곳이라고 판단하여 한국에 와서 1920년 11월 돌아가셨습니다. 향년 68세였습니다. 이 배화여고의 학생 중 한 명이 육영수 여사입니다. 한 알의 밀알로 가난과 무지로 찌들은 조선 여자들의 교육을 위해 희생한 캠벨 선교사의 일생은 이 나라 여성교육의 큰 이정표를 마련하였고 지금은 5만명에 이르는 배화 동문으로 성장하는 큰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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