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4. 2 – 6
대학교 교수가 된 어느 부인은 고백하기를 남편이 자신의 공부 자세를 보고 “ 내가 당신의 공부를 밀어주겠다” 한 뒤 자신이 공부에 전념하도록 일체의 뒷바라지를 하여 드디어 자신을 교수로 성공(?)시켰다고 한뒤, 학생들에게 “이렇게 남편이 자신을 도와주었기에 나는 남편을 버릴 수 없어요” 라는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자기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어느 정도의 수준으로 아내를 사랑하는가?’ 입니다. 성경은 결혼을 했으니까 마땅히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는 그런 의무감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남편들을 향하여 “내가 교회를 사랑하듯 너도 그렇게 아내를 사랑하느냐?” 하고 묻고 계십니다. 이 질문 앞에서 가책을 받지 않을 남편은 없을 것입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보다 신앙을 가진 사람이, 믿음이 약한 사람보다 믿음이 좋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더 깊은 죄책감을 느낄 것입니다. 사실 주님의 사랑은 자신의 모든 것을 주신 사랑이었습니다. 가장 완전한 희생을 담은 사랑이었습니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셨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할 때도 이처럼 철저한 희생을 수반하는 사랑을 해야 한다고 사도 바울은 가르쳐주십니다.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우리의 순종은 여기부터 시작되는 것이며, 동시에 가정의 행복 역시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남편되신 분들은 오늘 이 내용을 숙지하시고 아래 성경구절을 다시 한 번 되새기시면서 아내를 그렇게 사랑할 수 있도록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엡5:25).
미국에 돕슨이라는 가정문제 상담전문가의 저서 중 “남편이 알아야 할 아내에 대한 지식“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그에게 상담을 청한 부인들 중 50% 이상의 여성들이 자신감을 상실한 문제로 가장 고민하고 있다고 토로했다고 합니다. 이에대한 가장 좋은 약은 남편의 따뜻한 사랑입니다. 에베소서 5장 25절 이하를 보면 사도 바울은 주님이 교회를 사랑하시듯 또는 우리가 우리 몸을 사랑하듯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기를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교회를 사랑하시는 사랑과 우리가 우리 몸을 사랑하는 사랑 이 두 사랑 사이에는 어떤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옥한흠 목사님은 그 공통된 특징을 세 가지로 파악한 뒤, 첫째로 감싸 주는 사랑, 둘째로 위하는 사랑, 셋째로 격려하는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남편들이 이러한 특징들을 잘 이해한다면 보다 더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3:7).
예수님의 사랑을 한마디로 요약하여 말한다면 ‘섬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섬기는 것은 희생을 뜻합니다. 주님의 사랑은 생명까지도 희생하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주님의 모범을 남편의 사랑의 기준으로 말씀하신 뒤 다시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하라고 권면하심으로 부부 사이의 관계를 정리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자기의 몸을 무척이나 아끼고 위합니다. 가나안 농군학교 교장이었던 김용기 장로님은 생전에 꼭 새벽 4시면 일어나 2킬로미터 떨어진 뒤산의 기도굴로 달음박질하다시피 등산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식사를 할 때는 한 끼에 꼭 세 가지의 반찬을 드셨습니다.그러니까 하루에 아홉 가지 반찬을 골고루 잡수신 것입니다. 그리고 술 , 담배, 커피와 같은 자극적인 것을 금하고 육류를 줄이고 가급적이면 채식을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건강을 위해 많은 애를 쓰셨는데 만약 남편이 아내를 이 정도로 위할 수만 있다면 그 가정은 하루아침에 천국으로 변할 것입니다.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라”(엡5:29-30).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은 우리에 대해 꿈을 가지고 계십니다. 비록 주름투성이요, 흠 투성이긴 하지만 주님은 그러한 우리를 보시면서 기대를 하시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 설 때에는 그런 흠과 티가 없는 가장 아름답고 완전한 신부로 설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우리를 보십니다. 주님은 이런 꿈과 기대를 가지고 우리를 보시기 때문에 설령 우리가 잘못할 때라도 주님은 쉽게 실망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를 격려해 주십니다. “지금은 네가 약하지만 나중에 강해질 수 있어. 지금은 네가 부분적으로 알지만 나중에는 온전한 것을 알게 될 것이야. 그러니 실망하지 말아라.” 우리가 우리 몸을 사랑하는 것도 이와 비슷한 원리라고 생각됩니다. 우리 모두는 자기 신체 중에서 아름답지 않은 부분, 약한 부분을 잘 알고 있으며, 기대를 가지고 그 부분을 보완하려고 매우 애를 씁니다.그리고 기대를 가지면 가질수록 격려를 하기 마련입니다. 이와 같이 남편이 아내에게 기대감을 가지면 설령 아내가 부족함이 있을지라도 항상 격려해 주는 남편이 될 것입니다. 더구나 남편은 자신의 아내와 생명의 유업을 함께 받아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살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편은 아내를 기대하는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지금은 실망할 만한 것이 눈에 띄어도 점차로 멋있는 아내가 될 것이라는 꿈을 갖고 아내를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내의 경우 이런 남편은 오직 예수 믿는 남편만이 그렇게 아내를 대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남편으로부터 가장 순수한 사랑을 받고 싶다면 남편이 반드시 주님을 알도록 힘써야 합니다.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엡5:26-27).
남편이 아내를 진실로 사랑한다면 그것은 바로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내를 진실로 위해 주라는 말씀은 남편에게 무거운 짐을 지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를 사랑하는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옥한흠 목사님이 경험한 이야기입니다. 남편은 미국인이고 부인은 한국 출신의 국제 결혼을 한 부부입니다. 그 남편이 옥목사님과 같은 신학대학을 다녔기 때문에 서로 가까이 교제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옥목사님은 그 집에서 몇 달 동안 머무르는 동안 그분이 부인을 끔찍이 위해 주는 모습을 보고 적지 않게 감동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국제결혼을 하여 불행하게 살고 있는 한국 여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자연히 그 가정에 관심이 가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정은 달랐습니다. 부인은 남편보다 더 나이가 많은 데다가 외모도 별로 볼품이 없었고 학력도 중졸 정도이고 자녀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옥목사님이 놀란 것은 그 남편이 아내를 너무나 위해 준다는 것입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을까 하며 곰곰히 생각한 결과 옥목사님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습니다. 그것은 그 남편의 믿음이 탁월하게 좋다는 것입니다. 아내의 약한 부분을 사랑으로 감싸주고,위해 주고, 격려해 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받아 들이고 순종하기 때문에 그가 아내를 그처럼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내가 행복해 질 수 있는 지름길은 남편으로 하여금 믿음을 갖게 하고 그 믿음이 더욱 발전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발견하는 수준 높은 데까지 이르도록 남편을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아내는 믿지 않는 남편이 보기에 과연 그리스도인이라는 감탄사가 나올 정도로 주 안에서 남편을 머리로 존경하며 섬겨야 할 것입니다.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벧전 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