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11: 5-6)
삼일 운동의 중심지였던 태화관은 세종 때로 거슬러 올라가는 유서 깊은 곳이나 1908년 이완용의 소유가 되었다. 그러나 한일 합방 후인 1913년 자객이 두려워 집을 옮긴 후 요릿집으로 이름난 명월관이 이전해 왔다. 명월관 주인 안순환 씨는 태화관으로 이름을 바꾸고 1918년부터 장사를 하였으며, 1919년 3월 1일 아침 손병희 선생으로부터 점심 손님 30여명이 간다는 연락을 받았다. 당시 명월관 기생 이난향이 본 목격담이다. 하오 1시가 되었을 무렵 불교 승려와 교회 목사들이 대낮에 술파는 요릿집으로 몰려오는 이상한 장면이 시작되었다. 민족대표들이 본래 탑골공원에서 선언식을 하기로 했으나 청년들과 학생들의 폭력 시위를 우려하여 거사 하루 전에 갑자기 선언식 장소를 손병희 자신의 단골 요릿집 태화관으로 바꾼 것이었다. 안순환은 태화관 후원 깊숙한 언덕에 위치한 태화정인 ‘별유천지 6호실’을 준비하였다. 여기서 민족 대표 33인이 모여 역사적인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다. 3.1운동이 지나자 친일파로 욕을 먹고 있던 이완용은 매우 입장이 난감하여 태화관을 매물로 내놓았다. 그러나 3,000여평에 달하는 대지에 기와집만 16채가 있는 대궐 같은 저택을 사겠다는 사람은 선뜻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그 집을 사겠다는 작자가 나왔다. 그것도 여자들이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남감리회 여선교부였다. 3.1운동 이후 남감리회 여선교부는 ‘여자관’을 설립해서 지역사회에서 요구하는 사회 봉사 및 복지 사업을 통해 복음을 전하려는 ‘개방 선교’를 추진하고 있었다. 개성의 ‘고려여자관’, 원산의 ‘보혜여자관’, 춘천의 ‘춘천여자관’ 등이 그렇게 해서 생겨났다. 같은 맥락에서 서울에서도 이 같은 사업을 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을 찾고 있었다. 이런 때에 종로 한복판, ‘가우처 기념 예배당’ 바로 옆에 위치한 태화관이 매물로 나왔던 것이다. 이 지역 담당자 마이어즈는 집주인 이완용과 1년의 담판 끝에 1920년 12월 11일 20만원을 지급하고 매입하는 데 성공했다. 매입 자금은 미국 남감리회 선교본부에서 보내준 ‘선교백주년기금’으로 충당했다.
그러나 세 들어 있던 명월관 측이 임대 계약 기간이 아직 남았다면서 집을 비워주지 않았다. 장사가 잘 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되겠다 싶어 마이어즈는 전도 부인 이숙정과 박화정을 데리고 태화관에 방 하나를 차지하고 들어가 찬송을 불렀다. 그러자 요릿집 주인은 기생들을 시켜 밤새도록 장구 치고 노래하면서 잠을 못자게 하였다. 밤마다 전도 부인들의 찬송과 기생들의 창가 대결로 더욱 시끄러웠다. 그러다가 마이어즈는 청년들을 시켜 대낮에 명월관 기를 내렸다. 그러자 저녁에 명월관은 새 깃발을 꽂았다. 이렇게 며칠 기 싸움을 하다가 하루는 미국 국기를 꼽았더니 그제야 명월관이 손을 들고 이를 배후에서 지원하던 귀족과 양반들이 손을 뗐다. 자칫 외교문제로 비화될 것을 우려하였기 때문이었다. ‘미국 국기’의 위세에 밀린 안순환은 명동 입구에 ‘식도원’이란 음식점을 내고 그리로 옮겨갔다. 이로써 1921년 4월 4일 ‘태화여자관’(지금의 태화기독교사회복지관)이 개관되었다. 마이어즈는 초대 관장에 취임하여 태화의 한자 ‘太華’ 를 ‘泰和’로 고치고 ‘큰 평화의 집’으로 풀이하였다. 그리고는 태화의 이름으로 유치원과 탁아소, 여자실업학교, 여자성경학원뿐 아니라, 가정부인들을 위한 요리 강습, 재봉 교육, 영어 교육, 식생활 개선, 아동보건사업, 우유 급식 사업, 목욕사업, 청년과 직장인을 위한 성경공부,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유희장, 도서실 등 다양한 사업을 시작하였다. 그러자 오직 기생 외에는 여인들의 출입이 불가능했던 이곳에 다양한 계층의 여인과 아이들이 출입하게 되었다. 3.1 운동이 일어난 ‘별유천지 6호실’은 내부만 고쳐 태화유치원교실로 사용하였다.
1930년대 들어 태화여자관 사업은 더욱 확대되어 매일 500명이 넘는 이용회원을 수용하기엔 공간이 좁았고 조선식 기와집들이 서구적 사회복지 사업을 전개하기에는 불편하였다. 결국 선교부와 태화 직원들 사이에 오랜 논란 끝에 ‘사업을 위해 유적을 허물기로’ 하였으며 2년 공사 끝에 1939년 11월 연건편 718평 규모의 3층짜리 석조 건물을 지었다. 이 건물을 지으면서 백년 넘은 옛 건물과 정원이 헐렸고 유치원으로 사용되던 ‘별유천지 6호실도’ 헐렸다. 이 건물의 설계자는 강윤(1899-1974)으로 그는 동서양 건축 양식을 절충한 건물을 설계했으며 숨겨진 아름다움은 3층 예배실에 있었다. 여기에 강윤은 태극문양을 새겨 넣었다. 숨은 그림 찾기 처럼 눈여겨보야야만 찾을 수 있는 것은 일제 말기 상황에서 꺾이지 않는 민족의지를 보여주려는 건축자의 숨은 의도를 담고 있다. 강윤은 한국 근대 건축 개척자의 한 사람으로 꼽혔고 3.1운동 당시 공주 영명학교 졸업반 때 공주지방 만세시위에 가담하여 옥고를 치룬 뒤 윌리엄즈 선교사의 주선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부리스라는 미국인 건축가를 만나 건축을 배웠다. 평신도 선교사로 일본에서 ‘오미형제사’라는 건축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던 보리스는 강윤을 한국 대리인으로 내세워 한국에도 많은 건축물을 남겼다. 1933년 귀국하여 활동하기 시작한 강윤의 작품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이다. 신촌 이화여대 본관과 강당, 음악관, 공주 공제의원, 신세계백화점, 수유리 한신대학교 본관, 흑석동 중앙대학교 본관 건물, 세브란스 병원, 연희전문학교, 평양 광성중학교, 함흥 영생 중학교, 철원제일교회등을 지었다. (이덕주, 종로 선교 이야기, 42-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