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2018. 2. 19 – 23

성경에 욕심이 지나치면 죄를 낳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랑을 빙자한 이기심을 자제하지 못하면 결국 죄를 범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맙니다. 결과적으로 가정이 파괴되어 부부가 나누어지고 자녀가 삶의 의욕을 잃게 되는 아수라장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더러워지거나 자신을 절제하지 못하면 기도가 쉽게 막힙니다. 또한 사람의 마음은 이기주의자가 될 때 더러워집니다. 자기만 알고 자기 욕심만 차리고 욕구가 충족되지 않는다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더러운 마음이 가득할 때 당연히 하나님 앞에 기도를 제대로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를 하려는 사람은 마음의 눈이 밝아야 합니다. 마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기주의적인 사랑 때문에 마음이 침침하고 더러워져 있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수가 있겠습니까? 술에 취한 사람처럼 자기 통제가 곤란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사랑이 여러분의 가정을 튼튼하게 받치고 있는지, 가정을 떠받치고 있는 가족 간의 사랑이 혹시나 힘을 잃고 쓰러져 있지는 않은지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1:9-11).

변질된 사랑이 난무하는 오늘날 예수 믿는 우리들이 꼭 실천해야 할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그것은 “허다한 허물을 덮는” 사랑입니다. 오늘날 이 무서운 세대에서 우리가 가정의 행복을 지키고 가족 간의 인간관계를 아름답게 끝까지 유지하기 위해서는 허다한 죄를 덮는 사랑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허다한 죄란 부부 사이로 말하면 상대방에게 범하는 어떤 실수 혹은 고치지 못하는 약점, 치명적인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 죄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하면 부부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상대방에게 입히는 각종 정신적, 육체적, 물질적 피해를 가리켜 허다한 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모든 허물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허물을 덮어 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이 ‘덮어 준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용서한다’은 뜻이고, 다른 하나는 ‘피해를 감수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면에서 이 둘은 하나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용서하는 자는 바로 피해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상대방의 어떤 실수, 약점, 치명적인 범죄 등 이 모든 허물을 전부 용서하고 감수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인 것입니다. 운동경기를 이기기 위해 열심히 연습을 하듯이, 이런 인간관계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평소에 경건의 훈련을 하여 그리스도의 형상에 이르기를 힘써야 합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딤전 4:7-8)

18세기 미국 대각성 운동의 시발점인 부흥사 조지 화이트필드에게 누군가 A란 분을 칭찬하였더니 그분의 부인을 만나보지 않고는 믿을 수가 없다는 말로 대답하였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부부 사이는 가장 서로를 잘 아는 사이입니다. 그러기에 어떤 의미에서는 부부 사이란 가장 사랑할 수 없는 관계가 될는지도 모릅니다. 역설처럼 들리는 이 말은 현대인의 이기적인 사랑의 관점에서 보면 더욱 그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부는 상대방의 약점이 가장 쉽게, 가장 자주 노출되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가장 사랑해야 할 사이면서도 가장 사랑하기가 어려운 사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만 잘못해도 원망하거나 미워하기가 쉬운 것이 부부 사이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완전히 만족하고 사는 부부가 있을까요? 결혼 생활을 다소 경험한 부부들 중에는 상대방의 약점을 용서하지 못해서 가슴앓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못마땅한 것이 앙금처럼 가라앉아 있다가 작은 돌멩이 하나만 떨어져도 그 마음이 흙탕물처럼 더러워지는 사림이 있습니다. 때로는 은근히 멸시하고 때로는 무관심하게 대하는 부부들이 우리 주변에 많습니다. 그러나 네 형제를 “용서하라” “사랑하라”는 말씀은 바로 우리 부부관계부터 시작해야만 합니다. 허물은 덮어주고 장점은 칭찬해 주고 주님께서 교회를 위해 자신을 주심과 같이 남편은 아내를 위해 자신을 주면서 사랑해야만 하고 아내는 남편을 머리로서 받을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지음을 받았습니다. “너희가 서로 짐을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갈6:2).

행복한 결혼 생활을 끝까지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실감나게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부란 10대에는 서로가 꿈속에 그리며 살고, 20대에는 서로가 신이 나서 살고, 30대에는 서로가 환멸을 참으며 살고, 40대에는 서로가 체념하며 살고, 50대에는 서로가 가엾어서 살고, 60대에는 서로가 없어서는 안되니까 살고, 70대에는 서로가 고마워서 산다.” 결혼과 가정은 하나님의 놀라운 작품으로서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 특히 부부 사이에 서로 섬길 것을 요구합니다. 희생적인 사랑이 없이는 가정의 행복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사랑이 냉각되는 이때에 가정을 지키는 것은 이기주의적인 사랑으로는 절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이런 희생적인 사랑은 가정의 각 구성원의 위치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유의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가정의 주인이 되심을 인정하는 가운데 남편은 그리스도의 모범을 본받아 아내에게 자신을 주는 것으로 나타나고, 아내는 남편을 자신의 머리로서 인정하여 순종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자녀들은 부모님을 보물로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공경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부모는 자녀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기르도록 맡기신 선물이기에 최선을 다해 주님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다른 구성원을 위해 주려는 노력없이는 절대 가정에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엡5:25).

주전 700년 전에 기록된 선지자 이사야 53장 11절은 이렇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이 말씀 그대로 하나님의 종으로 오신 주님께서 사람이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인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가르쳐주신 산상수훈 등은 그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의로운 종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셨습니다. 우리 역시 이 길을 따라감으로 주님의 가르침을 체득하고 그 지식으로 많은 사람들이 의롭게 살도록 노력하여야만 합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주님은 친히 그 몸으로 당신의 백성들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이에 반해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죄를 담당하기는커녕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하지 말라고 명령을 받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각 사람이 자기의 죄악을 담당하여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와 다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 죄를 담당하시도록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어린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여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은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비록 다른 사람들의 죄를 담당할 수는 없어도, 그 허물들을 덮어주고 위해 주님께 기도해 줄 수는 있습니다. 우리의 부르심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가족들 그리고 형제 자매의 허물을 덮어주는 연습을 하고, 이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경건의 중요한 훈련 중 하나입니다.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딤전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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