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8 – 12
사랑의 대화가 있는 곳에는 마음의 병을 치료해 주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잠언은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16:24)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선한 말’은 ‘즐거운 말’ 혹은 ‘친절한 말’로 번역이 될 수 있는 단어로 ‘주어진 상황과 때에 맞는 적합한 말’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서로간에 다툼이 있어 대화가 단절된 그런 상황과 때에 적합한 말은 관계의 회복을 위하여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잘못을 한 상대방이 찾아와서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용서를 구하는 말이나, 다투던 남편과 아내가 잘못을 서로 인정하고 주님 안에서 용서하며 위로하는 말을 나눈다던지, 남을 용서하며 사랑으로 덮어 주기 위해서 눈물로 대화를 나누는 그 말이 선한 말입니다. 그런 선한 말은 너무나 귀한 것이어서 꿀송이 같다고 했습니다. 뼈가 썩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선한 말을 듣는 그 순간, 그 뼈의 모든 상처가 아무는 것입니다. 이만큼 사랑의 대화는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의 부모 형제 사이를 한번 검토해 보길 바랍니다. 부부 사이도 한번 검토해 보십시오. 사랑이 넘치는 대화 대신 대화가 단절되어 있고, 오해가 쌓이고, 마음속에 원통함이 있다면 이 말씀으로 마음의 병을 고쳐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의 가정에 대화의 꽃을 활짝 피워 주시기를 바랍니다.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잠16:20).
1970년도에 출판된 엘빈 토플러의 “미래의 충격”이라는 책에서 저자는 ‘바야흐로 변화의 물결이 우리의 현실 생활에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밀어닥치고 있다. 사회구조를 뒤엎고 가치관을 변화시키고 우리의 생활 신조까지 파괴하고 있다’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미래의 충격’의 11장의 제목은 ‘파괴될 가족’이라는 무서운 타이틀입니다. 미래사회는 초산업 시대가 되어 생명공학이나 생식생물학이 발달한다고 합니다. 이미 난자나 정자를 보관하는 은행이 있어 인공수정이 일반화되었고, 심지어 정자은행에 기증된 정자를 받아 인공수정으로 아이를 낳을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아이를 가지고 싶은 어떤 여자는 정자은행에 가서 기증한 정자를 통하여 아버지 없는 아이를 낳았습니다. 대리모의 이야기 역시 큰 뉴스가 아닙니다. 앨빈 토플러는 벌써 50년 전에 향후 사회에는 독신주의, 시리즈 결혼, 실험 결혼, 일부다처제, 동성연애가 공공연히 법적으로 공언되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예견한 바 있습니다. 이 모든 예견이 맞아 떨어진 것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습니다. 문명은 인간에게 유익하지만 현대 과학 문명은 인간성을 파괴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인격을 무시하는 기계화 시대, 로봇 시대에 접어들면서 로봇 가정부등 가정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시대로 진입하여 나가고 있는 이때 우리에게 가장 현명한 대답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한 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시127:1).
우리의 가정이 살아남는 길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온 우주의 주인이신 주님께 돌아가는 길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각 가정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영적인 혁명이 일어나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변화하는 우리 자신을 막을 길이 없고 붕괴되어 가는 가정을 막을 방도가 없습니다. 1990년 당시 옥한흠 목사님의 교회에 이런 위기감을 느끼고 부인들이 오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물론 자기 자신에 대한 갈등, 허무감 등이 작용하였겠지만 그 배경에는 무엇인가 위기의식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남편들도 자기의 아내나 자녀들이 교회에 가는 것을 옛날처럼 심하게 막으려 하지 않았고 아내나 자녀가 마치 안테나 역할을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교회가 과연 어떤 곳인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한번 보자는 속내가 있었다고 목사님은 추즉하셨습니다. 그러므로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이 험한 세상에서 자녀들을 키우는 부모들은 자신의 문제뿐만 아니라 장차 자녀들이 자라면 이 사회가 어떻게 될까 자녀들의 가치관이 어떻게 변할까 하는 근심이 늘 그림자처럼 따라다닙니다. 이 위기의식을 느끼는 부인들, 남편들이 교회를 찾아오는데 그들이야말로 가장 바른 길을 택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바로 그분이 가정을 창설하셨기에 가정의 구성원 모두 하나님 앞에 돌아가는 것만이 현대의 흔들리는 가정의 유일한 해결책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 (잠17:10).
가정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가정을 가정답게 만드시는 분도 하나님입니다. 그 가정을 행복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도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변화하는 사회에서 가정의 행복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가정에 모셔 들이고 그분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길을 떠나서는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부인이 예수를 처음 알았다고 한다면, 그 교회가 잘 양육만 하면 6개월이 지나기 전에 그 부인의 인격이 변화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던 마음에 그분이 들어와서 자리를 잡게 됩니다. 육의 사람이었던 자가 영의 사람으로 바뀝니다. 가치관이 달라지고 생의 목적이 달라지고 취미가 달라지고 생활양식이 달라집니다. 모든 것이 탈바꿈해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새로운 갈등이 가정 안에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모르는 남편과 자연히 대립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런 갈등은 대단히 견디기 어려운 시련일 수 있습니다. 이런 문제는 초대교회에서 벌써 일어났던 문제였고 그 정도는 오늘날 보다 훨씬 심각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설립한 고린도 교회의 경우 당시의 부인들에게는 인권이라는 것이 없었고 노예나 다름없이 취급되던 시절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고린도전서 7:13-16에서 사도가 주시는 신앙의 권면은 대단히 실제적인 동시에 복음적입니다. 여기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인간으로 오사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거룩하게 하신 것과 같은 내용의 말씀을 주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우리의 주인이실 뿐만 아니라 가정의 삶에서도 모범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엡1:10).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쓸 때는 AD 55년경이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각 가정에서 일어나는 분쟁은 매우 심각했습니다. 당시에 여자들의 임무라면 건강한 자녀들을 많이 낳아 주면 그것으로 도리를 다했다고 간주되던 시대이기에 남편이 제멋대로 행동해도 부인이 간섭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시대에 주부들이 예수님을 알고 믿게 된 것입니다. 자연히 어려운 문제가 하나 둘씩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집안에 갇혀서 그런대로 남편에게 복종을 잘하던 아내가 예수 믿은 후에는 너무나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남편과 함께 이전에 섬기던 헬라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고, 함께 우상의 고기도 먹지 아니하며, 기회만 있으면 찬송하고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가난한 자, 병든 자가 있으면 어느 때든지 달려가 도와주고, 감옥에 갇혀 있는 교회 지도자들을 찾아가서 위로해 주고, 예수 믿다 잡혀 가도 좋다고 담대하게 말하는 부인들을 보고 남편들의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집안에 보이지 아니하는 갈등이 계속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의 많은 가정에서 부부 사이에 심각한 대립이 생겼으며, 어떤 집에서는 남편이 부인에게 신앙을 포기하던지 아니면 자신을 떠날 것을 종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예견하신 그대로의 상황이 발생된 것입니다. 그럴 때 부인은 어떤 결정을 내려야 옳은 도리겠습니까? 고린도 교인들은 에베소에서 전도하고 있는 사도 바울에게 질문하였고 사도는 고린도전서 7장에 그 답변을 기록하였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눅 13:51-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