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2017.12.11-15

한국 구세군은 1907년 구세군의 창설자인 윌리엄 부스(1829-1912)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그 집회에 참석했던 한국 유학생들의 요청에 따라 부스는 한국원정 즉 선교를 결심하고 먼저 수행원을 한국에 보냈다가, 1908년에 이르러 호가드 대령 부부를 한국 원정 사령관으로 파송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호가드 사령관은 도착 즉시 선교를 개시 하였습니다. 그후 1909년 서울 서대문구 평동에 구세군 본영 사무실을 차리고 “구세공보”를 창간했으며, 그 이듬해에 구세군사관학교와 서울 교회당을 개설하였습니다. 1924년부터는 빈민 숙박 사업을 개시하고 1928년부터 자선냄비를 시작했습니다. 양화진에는 4-5명의 구세군 장교와 어린이들이 묻혀 있습니다. 여기서는 한국 구세군 중 헌신적인 두 분의 삶을 조명하고자 합니다. 먼저 이도식(리처드 윌리엄) 부령입니다. 그는 1878년 영국 런던에서 7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어머니 손에 이끌려 런던 거리에서 가두 전도에 참석했고 12세부터는 ‘꼬마 음악단’ 단원으로 활약하였을 정도로 구세군 가문의 사람이었습니다. 유럽 각국과 남아프리카 그리고 인도네시아 등지를 두루다니며 구세군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다가 1918년 한국에 파송되었습니다. 그러나 구세군 육아원에 천연두가 퍼지는 것을 결사적으로 막았지만 전염되어 1920년 별세하였고 그의 기념비가 북아현동에 세워져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 20:23-24)”

이도식(리처드 윌리엄) 부령이 재직 중 이룩한 사업은 남녀 사관 양성, 선교자금 조달, 남자 육아원 개원 준비, 구제 사업, 개전 10주년 대회 등이 대표적인 것이며, 그의 딸의 수기인 “선교사관 자녀의 수기”에는 서울에서의 삶이 감동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두 동생과 함께 서울에 간 것은 1918년 6월이었다 인도네시아에서 종려나무와 바나나 나무 만 늘 보다가 소나무를 처음 보니 아주 신기했다…..구세군인(교인)들이 집회(예배)에 나올 때는 반드시 성경책을 색깔 난 책보에다 소중히 싸 가지고 왔다……나는 우리 아버지가 밤중에 초롱불을 들고 시장에 나가 거지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것을 가끔 보았다. 이 거지 아이들은 훗날 다른 곳(북아현동에 1919년 신축된 집)으로 보내졌다. 서울의 고아원은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아버지는 아이들을 사관학교에 데리고 가서 목욕을 시키고 머리를 깎이고 새 옷을 갈아 입혔다. 그때 아이들은 얼마나 놀랐을까? 이렇게 생각되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천연두를 묻혀 와서 온 사관학교에 퍼지게 되었다. 그 당시 사령관은 프렌치 장이었는데 그가 인도로 전근되는 바람에 아버지가 임시 책임자로 있다가 천연두에 걸려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때는 1920년 2월 5일이었다. 장례식은 당시 중국 북경에 있던 차우도 정령이 와서 치렀는데 그때 부른 노래는 ‘고향과 친구를 멀리 떠나 우리는 전장에서 죽으리라’ 였던 것으로 기억 된다……”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행 21:13)”

한국 구세군 중 기억하여야 할 또 한 분은 위더슨 부인입니다. 위더스 부인의 남편은 크리스 위더슨입니다. 크리스 위더슨은 1926년 정위로서 한국 구세군 사령부에 파송되어 8년 간 일하다가 1934년에 한국을 떠났고, 1953년에 다시 한국에 파송돼 한국 사령관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그는 두 차례 한국에 파송되어 왔었는데 위더슨 부인은 그때마다 남편과 함께 와서 일했습니다. 위더슨 부인의 본명은 메리 코울이며 1894년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났습니다. 1910년 17세 때 부모를 따라 구세군 집회에 참석한 것이 인연이 되어 구세군에 평생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위더슨 부인은 천성이 온순하고 성녀다운 여성이었기에 한번 순정을 바치기로 결심한 후에는 절대로 변하지 않았고, 모든 구세군 집회에 참석하였습니다. 1914년 21세가 되는 해에, 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서 많은 젊은이들이 전쟁터에 끌려나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그녀는 더 성스러운 부름을 받게 되었습니다. “너는 그리스도의 병사가 되라!” 처음 부름을 받았을 때는 좀처럼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순종하기로 결단 하였습니다. 그 뒤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를 모시며 살다가 1924년 드디어 사관학교를 거쳐 부교가 되었고, 한국을 향해 떠나는 크리스 위더슨을 알게 되어 약혼을 한 채 1년 동안 서로 멀리 떨어져 구세군을 통하여 주님을 섬기는 가운데 사랑하였습니다. 그리고 1927년 한국에서 재회하였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삼상22-23).

위더슨 부부는 서울 교회에 있는 고아원에 신혼 살림을 차리고 7년 동안 고아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첫 아들을 낳자 아들과 한국 고아들은 곧 친구가 되었습니다. 두 부부에게는 그것이 너무나 고맙고 자랑스럽게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항상 전염병의 위협을 면치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거리에서 고아들을 데려왔기에 여러가지 병균이 함께 묻혀 왔던 것입니다. 위더슨 부인의 남편이 먼저 병군에 전염 되었습니다. 발진티푸스에 걸린 것입니다. 뒤따라 위더슨 부인도 앓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고열로 헛소리를 하고 며칠 동안 의식을 잃은 채 앓아 누웠습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도 위더슨 부인은 고아들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자기 병 보다는 도리어 고아들의 먹을 것, 입을 것 등을 걱정하면서 투병을 계속했습니다. 이렇게 7년간 한국에서 봉사한 뒤에, 또 7년간을 아프리카 케냐에서 헌신해야만 했습니다. 위더스내외가 휴가차 영국의 돌아갔다가 이번에는 케냐 구세군 총무 서기관으로 임명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거기서도 고아들을 돌보았습니다. 그들은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는 말씀을 되새기면서 불쌍한 고아들을 전력을 다해 보살펴 주었습니다. 그 뒤 위더스 내외는 남아프리카 여러곳을 다니면서 구세군의 사업을 통하여 주님을 섬겼습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25:40).

위더스 내외가 남아프리카 여러곳을 다니며 주님을 섬길 때 한국 동란이 일어났습니다. 외국 신문들은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났다는 보도를 대대적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공산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수백 만 국민이 죽고 국토가 초토화됐다는 보도, 양민 학살, 기아, 빈곤, 질병에 대한 보도가 매일같이 신문 지면을 차지하고 있던 중 하나님은 이들에게 “너희들은 이제 전과 같이 젊지는 않다. 내가 만일 힘든 곳으로 가라하면 어찌하겠는가? 내가 만일 한국으로 가라 하면 어찌하겠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위더슨 내외는 하나님의 부름을 듣고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용기를 내어 ‘예’라고 대답했습니다. 1953년 1월 그들은 피난 도시 부산에 도착하여 한국 구세군 사령부를 조직하였습니다. 남편은 구세군 사령관, 부인은 고아원 원장 겸 가정단 총재를 맡았습니다. 그렇게 지내던 중 위더슨 부인은 위암에 걸려 1956년5월10일 별세했습니다. 투병 중에도 그녀는 크리스마스 자선냄비 때에는 반드시 거리에 나가 전도지를 뿌리며 동료들을 격려하였습니다. 그녀는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면서 남편에게 “나는 어린 양의 피로 구속이 되었습니다……이것을 늘 기억하십시오. 내가 죽는다고 서러워 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오늘 나는 한국에서 하나님께로 가는 것을 무한한 기쁨으로 생각합니다.”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계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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