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2. 4 -8
이상재, 윤치호, 유성준, 김정식등을 비롯하여 여러 지식인들을 YMCA로 끌어들인 데는 형인 플레쳐 브로크만의 공헌이 컸습니다. 플레쳐 브로크만은 가끔 초빙을 받아 우리나라에 와서 YMCA 지도자 훈련에 공헌 했습니다. 그리고 1920년 당시 YMCA의 총무 신흥우가 농촌 운동을 시작할 때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신흥우는 동생 브로크만과 함께 국제 YMCA를 방문 하고 그 지도자들과 협의회를 가졌는데 거기에는국제 YMCA의 총무를 비롯하여 백화점 경영자 J.C. 페니와 형 브로크만이 참석하였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레이크플래시드 5인회담’이라는 것인데, 이 회담에서 국제 YMCA는 미국과 캐나다에서 열 명의 농촌운동 전문가를 파송하는 동시에 기술 및 재정 원조를 해 주는데 합의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형 브로크만의 제일 큰 공헌이라 할 점은 그의 동생 브로크만을 우리나라 YMCA 간사로 선정 파송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동생 프랭크 브로크만(1878-1929)이 중국에서 자기와 함께 일하고 싶다는 것을 거절하고 한국으로 보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1902년 대학을 졸업하고 네브라스카 오마하의 학생부 간사로 취임하여 유명한 F.I 윌리스의 총무의 지도를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1905년 한국 YMCA의 공동 총무로 파송되어 내한한 뒤로, 1929년에 죽어 양화진 외인묘지에 묻힐 때까지 24년간 한국 YMCA를 위하여 헌신했습니다. 그가 끼친 공헌은 실로 빛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행15:10).
프랭크 브로크만은 1907년 일본 동경에서 제7회 세계기독학생연맹 대회가 열렸을 때 윤치호, 김규식, 김정식, 김필수, 민준호, 강태융 등 6명의 한국 YMCA의 대표들과 함께 참석했습니다. 이 대회는 동양에서 처음 모였던 국제대회였을 뿐만 아니라 에큐메니컬 운동사에서도 매우 뜻깊은 모임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그는 한국 학생 YMCA 운동의 개척자가 되었습니다. 프랭크 브로크만은 1910년부터 학생 YMCA 하령회를 개최하는 데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는데 이 하령회는 6월22일부터 27일까지 서울 진관사에서 개최되었고, 전국 각지에서 46명의 학생이 모여들었으며, 4개국에서 16명의 강사가 초빙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학생 YMCA 운동이 불일 듯 일어나자 YMCA 당국은 한국인 학생 YMCA 담당 간사를 물색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상재 선생의 추천으로 이승만이 담당하기로 결정되었습니다. 그때 이승만 역시 프린스톤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온 뒤로 장차 무엇을 할 것인지 고민하고 있던 터라, 마침 대선생이며 감옥 안의 동지인 이상재의 간곡한 귀국 권유를 받게 되니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승만은 출국한 지 6년 만인 1910년 가을 고국에 도착했으나 그 해 8월 10일 일본에 의해 한국이 합방 당한 직후였기 때문에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가다듬고 일에 착수하기 시작하여 약 6개월 동안 매주일 오후에 성경반을 인도하는 등 브로크만과 함께 학생들과 계속적인 모임을 가졌습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컫음을 받게 되었더라” (행 11:25-26).
브로크만은 이승만과 함께 1911년 5월부터 6월까지 전국 순회여행을 떠났습니다. 이들은 37일 동안에 총 3,680킬로미터를 여행하였고, 13개 선교구역을 방문했으며, 33번의 집회에서 7,535명의 학생들과 만났습니다. 그리고 지방에 있는 여러 학교에서 YMCA 학생 지부를 구축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 순회여행 후 개성에 들려 제2회 전국학생하령회를 개최하였습니다. 이 학생하령회는 윤치호가 대회장으로 주관했고 전국의 21개 학교에서 2명 이상의 대표 93명이 참석하여 다른 공, 사립학교 학생들에게도 큰 자극을 주었습니다. 이에 대해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보고했습니다. “강사로는 뉴욕에서 초빙되어 온 화이트씨와 인도에서 온 에디씨였습니다. 이 하령회는 대성황을 이루었으며, 우리는 기독교 학생들에게 접근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존경하는 친구들이여, 이 땅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다음 학년 동안에는 그리스도의 승리로 나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여 주시기 바라옵니다.” 이와 같이 학생하령회가 성황을 이루게 된 것은 약 10개월 전에 한일합방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거기 모인 93명의 학생들과 우리나라 강사들은 비통한 나머지 울음바다를 이루었고 항일과 애국을 굳게 다짐하였습니다. 이런 대회의 진행은 드디어 총독부의 신경을 자극하여 1912년 2월 YMCA 부회장 윤치호를 비롯한 양전백 목사와 양준명 전 학생대표 등 YMCA 학생하령회의 강사들이 검거되었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105인 사건입니다.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롬 9:2-3).
서북 지방의 기독교인들과 안창호의 신민회 회원들이 데라우치 총독이 압록강 철교 준공식에 참석하러 갈 때 암살하려고 음모했다는 것으로 날조되어 일어난 민족지도자 105명을 검거한 이른바 105인 사건은 YMCA의 세력을 꺽으려고 한 목적도 담겨져 있었습니다. 당시 YMCA 총무이던 질렛트는 다음과 같이 일제의 잔악성을 폭로했습니다. “모든 피고인들은 혹독하 고문에 못 이겨 소위 자백서라는 것을 썼는데, 그 자백서 내용을 보면, 1911년 YMCA 국제위원회 간사들(브로크만과 이승만)이 조직한 학생하령회는 윤치호 등 주모자들이 모여 흉계를 꾸민 중요한 장소가 되었으며…….윤치호 씨는 이 하령회의 대회장이었으며, 에디, 화이트, 와이어, 이승만, 브로크만, 기타 명사들이 여기에 참석하였으며 특히 이승만과 브로크만은 처음부터 나중까지 학생들과 숙식을 같이하면서 모사를 했다는 것이었다” 결국 105인 사건으로 윤치호는 10년 징역형을 언도받았다가 6년으로 감형되었으며, 질렛트 총무는 국외로 추방되었고, 이승만과 김규식은 국외 망명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YMCA 주요 간부로서 브로크만과 이상재만 검거되지 않고 남아 뒷수습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의 지도력은 탁월하여서 한일합방이 이루어질 무렵 국내의 모든 민간단체는 해산되었지만 오직 YMCA만이 살아남았으며 오히려 전국 연합 기관으로 강화되어 한국민족의 얼을 지켜주었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마10:16).
월남 이상재와 브로크만은 특별한 사이였습니다. 1907년 헤이그밀사 사건직후 고종황제가 왕위에서 밀려나게 되자 이상재는 실망한 끝에 자결로서 나라와 운명을 같이 하고자 했습니다. 이때 선생을 붙들고 간곡히 자결을 단념게 한 사람이 바로 브로크만이었습니다. 이러한 인연으로 해서 이 두 사람은 쑥밭이 된 YMCA를 뒷수습 하는데 손발이 잘 맞았습니다. 국외로 추방된 질레트 대신 이상재가 후임 총무가 되었고 이사회에서 파면당한 김인 대신에 브로크만이 부 총무가 되었습니다. 이 때는 1913년으로 이상재는 64세의 노인이었고 브로크만은 36세의 청년이었습니다. 실상 브로크만은 YMCA 활동에 열중 한 나머지 결혼할 여유도 없다가 친구들의 권유에 못 이겨 1912년 35세가 되어서야 결혼을 했습니다. 평생을 그렇게 열심히 일한 탓에 1927년에는 과로로 중병에 걸렸고 미국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도 병을 고치지 못하여 1929년 6월 10일 프린스턴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례식은 프린스톤 신학교 교장 주례로 거행되었으며 그 유해는 친구들에 의하여 한국으로 이송되어 양화진 외인 묘지에 안장 되었습니다. 그 묘비에는 “24년간 한국의 증인, 일꾼, 평화의 인, 한국인의 친구, 프랭크 M. 브로크만의 무덤”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또한 알았도다” (전 3: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