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읽기

2017. 11. 27 – 12.1
베어드의 교육 사업이 큰 열매를 맺은데는 두 가지 큰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선교지 자립 정책인 네비우스 선교 방법을 우리 나라 실정에 맞도록 적당히 수정하여 적용시킨 점입니다. 즉, 네비우스의 세 가지 자주 정신 즉, 자력 유지, 자주 치리, 자진 전도의 정신을 평안도 사람들이 본래부터 갖고 있는 개화, 독립, 하나님 숭배 정신에 접목시켜 발전 시켰던 것입니다. 그 결과 평양 숭실학교는 학생들이 학자금을 자급하도록 하여 자립 정신을 확립시켰습니다. 사실 베어드의 숭실학교 경영 이상은 미국 미주리 주의 장로교계 학교인 파크 대학과 포이넷트 아카데미였습니다. 이 학교들은 학생 전원이 학생지도관에서 일주일 동안 일정한 시간을 작업하도록 한 뒤 그 수입으로 학생들이 자력으로 학자금을 마련할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배운 기술을 졸업후 사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물론 그는 이 정책을 한국에 맞게 변형하여 적용하였습니다만, 육체노동을 천시하고 글 읽는 것만 자랑으로 생각하던 조선 사람들의 뿌리 깊은 병폐를 개혁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교내에 소위 자조 사업부를 두었고 학생들에게 근로와 자조 정신을 불어넣어 주는 것을 제1의 교육목적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자기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먹을 것이 많거니와 방탕한(비었다는 의미임) 것을 따르는 자는 지혜가 없느니라”(잠12:11).

베어드의 교육 사업이 큰 열매를 맺은 두 번째 이유는 창의적인 교육 정책입니다. 그의 교육 정책이란 고아원이 아닌 정규학교 교육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개척 선교사들과 달리 베어드는 학생들에게 수업료를 받으면서 교육을 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가 내세운 교육 정책은 (1) 학교 교육은 실생활에 필요한 모든 분야를 가르치고, 학생들로 하여금 사회적 책임과 의무를 감당케 하는 교육이어야 하며, (2) 학생들의 종교적, 정신적 발육을 가져올 수 있어야 하며, (3) 특히 선교부가 경영하는 학교는 토착 교회 발전에 이바지 하고 인근 사회에 기독교 신앙을 심어 주는데 있어야 한다고 역설하였습니다. 더나아가 “학생들이 이런 교육 원칙대로 잘 훈련만 되면 졸업 후 그가 농부가 되든지, 제철공이 되든지, 혹은 의사, 교사, 공무원 등 무엇이 되든지 그들은 전부 자기 직업을 통하여 기독교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하며, 선교사들은 학생들이 전도자가 되게 하는 것을 우선적인 사명으로 해야 하지만, 거기까지는 못 간다 하더라도 학생들이 건전한 국민이 되게 하는 데에는 성공해야 한다”는 논지를 개진하였습니다. 이런 말은 그 당시 실정에서는 하나의 혁명적인 교육 사상이었습니다. “네가 자기 일에 능숙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 (잠 22:29).

베어드의 부인인 애니 베어드는 남편을 따라 1897년 평양으로 이주한 뒤 숭실학교에서 식물학·천문학·지리학 등을 가르쳤고, 숭실학교가 필요로 하는 교과서 편찬 작업을 수행하였는데, 애니 베어드가 편찬한 교과서는 한국에서 만든 근대 학교의 최초의 교과서였습니다. 또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한국어 찬송을 역편(멀리멀리 갔더니 등)하고 교회 음악 발전에도 기여하였습니다. 한편, 베어드 여사는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역사와 현실, 문화와 삶을 이해하려고 노력한 인물로서 기독교 신앙의 토대에서 문화를 변혁시키고자 노력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애니 베어드에게 있어서 기독교 신앙의 전파는 문화 변혁 운동이기도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을 잘 보여 준 것이 애니 베어드의 문학작품인 『고영규전』과 『Day Break in Korea』 라는 작품입니다. 실상 베어드 여사는 복음주의 혹은 보수적인 신앙인으로서 유교적인 조선 사회를 기독교적 가치로 재해석 하려고 시도하였는데, 이를 두 가지 방법으로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하나는 학교 교육이었고, 다른 하나는 문서 운동, 곧 저술 활동이었습니다. 그래서 애니 베어드는 숭실학교에서 일하면서, 여러 책을 저술하거나 역간한 훌륭한 문필가였습니다. 그러나 1915년 암 치료차 미국에 갔으나 가망이 없자 한국에서 죽겠다는 일념으로 다시 배를 타고 와서 세브란스에 입원 한 뒤 1916년 6월 세상을 떠났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지식을 전하지만 미련한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잠15:7 현대인의 성경)

오늘부터는 YMCA의 부흥 운동가였던 브로크만 형제(플레쳐 브로크만과 프랭크 브로크만)에 대하여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플레쳐 브로크만은 동생 프랭크 브로크만 보다 11년 앞선 1867년에 태어나 1944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1901년부터 1915년 까지 중국의 YMCA의 총무를 역임하였습니다. YMCA의 역사가 홉킨스는 “플레쳐 브로크만 만큼 전 세계 YMCA 협력 사업계에서 존경받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공자의 정신과 그리스도의 정신을 잘 융화시켜 살았다”라고 평가한 바 있습니다. 그가 YMCA 운동에 뛰어든 것은 1891년 부흥사 디엘 무디의 권유였습니다. 우리나라와의 인연은 밴터빌트 대학 시절에 처음으로 이루어졌습니다. 1884년 갑신정변 때 중국으로 망명갔다가 예수를 믿고 미국으로 유학을 갔던 윤치호를 밴터빌트 대학에서 만난 것이 계기였습니다. 그들은 동창생으로서 절친한 친구로 지냈습니다. 그는 한국 YMCA의 창립 간사로 발탁된 질렛트의 초청으로 1903년 특별강사의 자격으로 한국에 온 바 있었습니다. 이 당시 한국 YMCA는 건축비의 모금에 신경을 쓰고 있었으나, 그는 어떤 종류의 청년들을 대상으로 YMCA를 운영할 것인가에 더 신경을 쓰게 되었고 결론은 상류 지식층 청년을 대상으로 할 것을 결정하게 되었고 초창기 YMCA는 이상재, 윤치호, 유성준, 김정식, 신흥우 등 독립협회 지도자들이 예수를 믿고 들어와 중심 세력을 구축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결정한 배후에는 언더우드 선교사의 한국 청년들에 대한 귀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집은 지혜로 말미암아 건축되고 명철로 말미암아 견고하게 되며 또 방들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각종 귀하고 아름다운 보배로 채우게 되느니라” (잠24:3-4).

YMCA가 설립될 때 그 대상되는 청년층을 일반 교회와는 달리 상류 지식층 청년들을 상대로 조직하기로 결정하게 된 배경을 브로크만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였습니다. “당시 상류계급 출신의 청년들에게 접근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웠느냐 하는 것은 언더우드 박사가 내게 말한 애기를 통해서 잘 알 수가 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어떤 양반이 기독교에 접근하고 싶으나 차마 교회에는 나갈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이미 하층 천민들이 점거했기 때문에 자기는 양반 출신으로 거기 가서 앉기가 어렵다며, 자기들을 위하여 따로 자리를 마련하여 줄 수 없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언더우드 목사는 양반 출신 청년들을 자기 집으로 불렀습니다. 5, 6명 정도의 청년들이 올 줄 알았는데, 그 이상으로 너무 많이 오기에 그것을 중지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착안하여 언더우드, 아펜젤러 등 선교사들은 양반 출신 청년들을 중심으로 YMCA를 창설하기로 최종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일본의 교회들과는 달리 한국의 교회들은 시작될 때 천민과 서민 중심으로 시작된 것이 사실이어서, 한편으로는 교인들의 지식수준을 높일 필요가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반 지식층, 지배층, 학문계에 복음을 전할 수단의 하나로 YMCA를 창설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므낫세 반 지파 중에 이름이 기록된 자로서 와서 다윗을 세워 왕으로 삼으려 하는 자가 만 팔천 명이요, 잇사갈 자손 중에서 시세를 알고 이스라엘이 마땅히 행할 것을 아는 우두머리가 이백 명이니 그들은 그 모든 형제를 통솔하는 자이며” (역상 12: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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