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읽기

2017. 11. 20 -24

오늘부터는 한국의 성공회 토착화의 주역인 토너 주교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터너(Arther B. Tuener)는 영국 출신 성공회 신부로 1862년 8월 영국에서 출생했으며, 옥스퍼드 대학과 커데스돈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1888년 사제에 서품되었습니다. 한국에는 그로부터 8년이 지난 1896년 12월 2일에 도착하여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물론 그보다 먼저 1890년 한국에 개척선교사로 파송된 성공회 소속 신부로 코프라는 분이 계셨으며 코프 신부에 의해 한국에 성공회 성당이 정동에 1892년 세워졌고 현재 그 자리에 서울성공회성당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격적인 전도는 터너 신부가 한국에 파송될 무렵인1896년 12월 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터너는 전도에 열중하는 것 외에 스포츠 보급에도 커다란 공헌을 하였습니다. 관립 영어학교가 1894년 설립되었는데, 터너는 유명한 축구 선수출신으로 이 학교 학생들에게 축구를 가르쳤습니다. 처음에는 학생들끼리만 공을 차게 하다가 차츰 학생들의 실력이 향상 되었을 때 영국 공사관 팀과 시합을 하게 됐고 터너는 언제나 심판을 보았습니다. 그는 매우 공을 잘찼던 분으로 한쪽 골대에서 공을 차면 저쪽 골대까지 공이 가 닿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터너 신부는 비단 기독교 선교뿐만 아니라 한국에 축구를 도입, 발전시킨 한국 스포츠의 선구자이며 공로자이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딤전 4:4-5).

터너는 성공회 신부이기 전에 먼저 평신도적인 활약이 컸습니다. 그는 당시 황성기독교청년회 운동에 깊이 관여했습니다. 황성기독교청년회, 즉 한국 YMCA는 1901년부터 태동을 시작하여 1903년 10월 창립총회시에 터너는 12명의 창립 이사 중 한 사람으로 뽑혀 1907년부터 1910년까지의 중요한 기간에 YMCA의 회장으로서 크게 활약하였습니다. 한국은 1905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당하였고, 1907년 헤이그밀사 사건으로 고종은 퇴위 당했습니다. 이때 영일동맹이 맺어진 상태였기에 일본의 만행을 방어하기 위해 영국 사람인 터너가 회장으로 뽑혔던 것입니다. 과연 터너는 그의 덕망과 지도력, 정치적 역량과 국제적 배경으로 일본의 탄압행위를 막는데 든든한 방패가 되어주었습니다. 한편 회관 설립에도 박차를 가해 질렛트 총무와 미국 YMCA 총무 모트의 주선으로 미국 백화점 왕인 워너메이커의 재정 원조를 받아서 새 회관 건축을 하였습니다. 1907년에 착공하여 1908년 준공된 YMCA 회관은 1천평 대지 위에 세워진 3층 벽돌집으로 약 6백 평 건물이었지만, 보일러 시설까지 완비된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식 건물이었습니다. 당시 초가집만 즐비하였던 종로 네거리에 들어선 YMCA의 현대식 건물은 온통 선망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딤후 2:3-4).

터너 주교의 공헌은 YMCA 회관 건축에서만이 아니라 회원의 확대 및 청년 운동의 조직화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회원 조직의 경우, 때마침 일제의 탄압으로 해산되었던 상동교회의 청년학원 및 신민회 지도자 전덕기 등을 포섭하여 본래 YMCA 내에 있던 이상재, 윤치호, 이승만, 김규식 등 과 함께 일종의 기독교 연합 세력을 구축했습니다. 당시 YMCA는 실무 직원들만 해도 83명이나 되었던 규모였기에 서울 인구가 20만명밖에 안되었던 그즈음 일본도 건드리기 어려울 정도로 당당하였습니다. 이런 터너 주교의 활약은 그의 목회관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그는 1908년 6월 발간한 월간지 <종고성교회월보>에서 목회방침을 밝혔습니다. 첫째, 신앙과 현실의 문제에서 인간의 현실 문제를 무시한 신앙은 죽은 신앙이라는 것, 둘째, 신앙과 사회참여 문제와 관련하여 성공회 신도들은 절대로 일진회에 가담해서는 안 되며, 항일운동은 곧 신앙운동이며 불의와 싸우는 것은 교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는 것, 셋째, 성공회 신도들은 어디까지나 순수한 신앙적 동기로 믿어야지 단순히 병이 낫기 위하여 또는 어떤 인간적인 복을 받기 위하여 믿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목회원칙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의 목회관은 세상에서 성도들은 어떤 입장을 유지해야만 하는지 복음의 분명한 방향을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마5:13).

터너 주교는 한국 교회의 자립과 남녀 평등을 위한 교육에도 많은 힘을 쏟았습니다. 한국의 초대 교회는 많은 경우 선교사들이 직접 경영하고 모든 경비를 선교사들이 전담하는 폐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터너 주교는 이를 반대하였습니다. 그는 한국 교회는 한국인 스스로가 운영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므로 한국 성공회는 터너 주교 때부터 토착화의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각종 경비, 즉 학교 교사와 전도사의 월급, 교회 건축비, 신설 학교의 운영비, 고아원 등 사회사업 단체의 운영비, 병원 사업비 등을 한국인들이 감당할 수만 있다면 선교사들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터너 주교의 목회 이상은 한국 교회의 자립에 있었습니다. 당시 자립 교회의 대표적인 교회로 강화에 있는 교회들을 들 수 있습니다. 1908년 강화 온수리교회의 경우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고, 진천교회는 제 힘으로 성당을 지었는데, 전도를 시작한 지 불과 3년 만에 소관 동네가 20여 곳이 되었고, 신자가 수천 명에 달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한편, 터너 주교는 “남녀가 한 가정에서 조화 있는 생활을 하려면 남녀가 동등해야 한다. 그 본분이 다르기 때문에 그 분량대로 법도에 따라 서로 상의할 수 있는 관계가 유지되어야 한다”고 밝힘으로써 남녀의 동등과 함께 그 차이를 주장하면서 도처에 신명, 진명의 명칭으로 학교를 세워갔습니다. 그러나 1910년 10월 28일 터너 주교는 과로로 순직하였습니다. 향년 48세였습니다. 그의 한국이름은 ‘단아덕’이며 그의 아름다운 덕행으로 인해 지어졌고, 양화진 외인묘지에 묻혔습니다. “많은 재물 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 (잠언22:1).

오늘은 숭실대학의 창설자 베어드(William M. Baird) 선교사에 대하여 생각해보겠습니다. 베어드는 1862년 인디애나 주에서 출생하였습니다. 1885년 하노버 대학을 1886년 매코믹 신학교를 졸업하였고, 후에 철학박사와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베어드 부부가 1891년 선교사로 조선에 온 것은 맥코믹 신학 시절 D.L 무디에게 받은 영향 때문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부산에서 서상륜의 도움을 받아 선교하였으나 1895년 대구에 집을 사서 선교를 함으로 대구 최초의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그와 그의 부인(애니 베어드)은 교육에 탁월한 선교사들였기에 장로교선교부는 1896년 서울로 베어드 부부를 불러들여 장로교의 교육사업을 맡겼습니다. 그는 곤당골에 학교를 세웠고 본래 있던 예수교학당도 맡아했지만 이 학교들은 배움에 목마른 학생들이 아니라 전부 고아를 상대로 한 것이며 그것도 보잘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아가 아니라 “한글을 교육 용어로 하여 기독교 교육을 받으려고 지망하는” 적당수의 학생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전망이 보이면 자신의 선교 활동을 교육사업에 집중하여 열매를 맺고자 하였습니다. 그 일환으로 드디어 베어드는 안식년을 마친 뒤 1897년 10월 평양 신양리에서 숭실학교를 시작했습니다. 숭실학교는 장로교가 세운 최초의 정규 중학교이며 후에 숭실대학으로 발전하여 산업역군을 양성하고, 민족 지도자들을 배출하였으며 항일운동의 발원지 중 하나가 됨으로 베어드의 교육사업은 큰 열매를 맺었습니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잠언 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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