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1. 6-10
오늘부터는 윌리엄 제임스 홀 선교사에 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는 평양 지역의 개척 선교사였습니다. 홀은 의사이자 목사였습니다 1860년 캐나다에서 태어나 1894년 11월 24일 한국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불과 34살의 아까운 나이였으며, 1891년 12월 한국에 파송된지 불과 2년 11개월만이었고 다음날 양화진에 묻혔습니다. 그러나 짧은 기간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긴 업적은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와 감화를 끼쳤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평안하고 살기 좋은 서울을 떠나 멀리 평양에 가서 선교하기를 무척 원했고 청일전쟁이 끝난 바로 직후 평양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병자를 돌보고 신자들을 심방하고 밤 예배를 인도하는 등 평양시민을 위해 최선을 다하다가 장티푸스에 감염이 되어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홀이 죽자 그의 유지를 이어받은 부인과 아들은 수십년 간에 걸쳐 병과 가난으로 버려진 한국민들을 섬김으로써 위대한 업적을 한국 땅에 남겼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활동은 양적인 면보다는 질적인 면에서 평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의 죽음을 지켜본 선교사 마펫은 “홀은 주님의 명령에 따라 살다가 죽었다. 주님이 명령하매 기꺼이 한국에 왔고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로 갔다. 그는 위대한 신앙, 위대한 사랑, 위대한 자비의 사람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날 생명의 부활로 무덤 속에서 나올 것입니다“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윌리엄 홀 선교사는 1860년 1월 16일 캐나다 온타리오 주 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는 장로교와 성공회 신자였으나 홀은 15세되는 해에 감리교회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거기서 큰 감화를 받아 감리교에 입교하였습니다. 이어 뉴욕의 벨리뷰 의과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한 뒤 1889년 졸업했습니다. 그가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의과대학에 다니던 1887년 7월 유명한 부흥사 디엘 무디가 인도하는 학생 수련회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은 뒤였습니다. 의대를 졸업한 뒤 계속 선교사와 의사의 훈련을 받은 뒤 1891년 북감리교선교회로부터 선교사 임명을 받게 되었으며 그때 32세의 총각이었고 단신으로 1891년 12월 제물포에 도착하여 바로 서울로 인도되었고 아펜젤러 집에 여장을 풀었습니다. 후배 선교사를 맞이한 아펜젤러는 홀을 보자 바로 그에게 훌륭한 선교사로서의 자격이 있다고 평가했다고 합니다. 조선에 도착한지 불과 3개월 뒤인 1892년 3월2일 몇몇 안내자를 앞세우고 동료 선교사 존스와 함께 왕복 40여일 동안 서울에서 의주까지 선교지 탐험을 감행하여 조선 선교의지를 불태웠습니다. 그는 존스와 함께 고양, 파주 등을 지나 송도에 도착해서 얼음장 같은 객줏집 온돌방에서 자고 꽁꽁 얼어붙은 보리밥으로 식사를 하였습니다. 봉산을 지나 황주를 거쳐 평양에 도착하니 3월14일이었고 당시 평양 인구는 약 10만명이었습니다. 한 주일 동안 평양에 머물면서 약과 성경책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는 복음의 불모지인 이 평양에 복음을 전하고 의술을 펼칠 것을 결심하게 되어 그해 8월 평양 지방 개척 선교사로 파송되었습니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10:15).
1892년 3월 서울에서 의주까지 40여일 동안 선교여행을 떠났을 때 홀은 여행내내 각 지방 전통음식을 먹었습니다. 한번은 참 맛있게 국을 먹은 다음 마당에 나가 쉬는데 지붕 위에 무슨 짐승의 가죽을 말리고 있기에 주인에게 물었더니 개 가죽이라고 했습니다. 조금 전에 맛있게 먹은 국은 바로 저 개를 잡아 끓인 개장국이었던 것입니다. 이 말에 홀은 놀라기는커녕 도리어 행복한 웃음을 보이더라며 동행했던 존스는 “홀 의사가 여행 중에 보여 준 그 영웅적이며, 성자다운 풍모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탄복하였습니다. 이 처럼 조선에 들어와서부터 홀은 동료 선교사들에게 훌륭한 선교 정신의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1892년 8월 홀은 감리교 선교사 연차회의에서 평양 지방 개척 선교사로 임명되어 1893년 3월 평양에 파송되었습니다. 그때는 이미 평양감사로부터 금교령, 즉 기독교 서적을 팔아서는 안 된다는 명령이 내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홀은 평양에 도착하자 집 한 채를 사서는 본격적인 의료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환자들에게 의료혜택을 베풀어 평양감사의 호감을 샀고 그 결과 성경책을 나누어주는 등의 선교활동도 더 많이 할 수가 있게 됨으로 감리교의 평양 지방 개척선교의 뿌리가 내려질 수 있었습니다.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13:47-48).
홀의 부인 로제타 셔우드 홀은 1865년9월 뉴욕에서 출생하였습니다. 펜실베니아 여자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1890년 25세의 처녀 의료선교사로 조선에 파송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스크랜톤이 경영하는 상동시병원에서 근무하다가 1892년 6월 홀과 결혼하였습니다. 1894년 5월에 이 신혼부부는 갓난 아들을 데리고 평양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 후 많은 박해를 겪어야 했는데 그 중 한 가지만 들어 보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도착하자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구경하러 왔다. 전부 대문 안으로 들어올 수가 없어서 큰 소동이 일어났고 나중에는 감사에게 보호를 청하기까지 했다. 한편 우리의 심복 김창식이 잡혀 투옥되었다. 우리가 살던 집주인도 투옥되었다…. 장로교 마펫 목사의 조사와 집주인도 잡혀갔다. 그들은 모두 쇠고랑을 찬 채 심한 고문을 받고 있었다….그들은 모두 임금님의 엄명에 따라 처형되어야 할 것이며, 사형수 감방에 옮겨져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10만 평양 인구 중에 외국인이라곤 오직 홀의 가족뿐이었습니다. 사태가 급해지자 홀은 아내와 아기를 집에 남겨 둔 채 이리 뛰고 저리 뛰어 전보를 치는가 하면 평양감사에게 달려가 애걸하였습니다. 그러나 사태는 별 진전이 없었고 홀이 집을 비운 사이 그 집에는 돌맹이가 날아들고 담장이 무너지는 험악한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홀의 평양 선교는 이런 식으로 시작되었으며, 4개월 뒤에는 청일 전쟁까지 터졌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홀연히 주의 사자가 나타나매 옥중에 광채가 빛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이르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행12:5-7)
청일전쟁 끝나자 부상자를 치료하며 평양시민을 돌보기 위해 홀은 서울에서 평양으로 내려와 많은 사람을 진료하던 중 자신도 전염병인 장티푸스에 감염이 되었고 대동강에서 목선을 타고 제물포에 도착한 뒤 다시 배를 타고 강화도와 김포 사이의 수로를 따라 서울을 향해 거슬러 올라가서 이튿날 아침 서울에 도착하니 때는 1894년 11월 24일이며 부인의 극진한 간호에도 불구하고 홀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홀이 별세한 후 그의 부인 로제타 홀은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물론 혼자서 간 것은 아니고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가 될 박에스더를 미국에서 의사훈련을 받게 하기 위해 데리고 갔으며 몸에는 이미 유복녀인 에스더를 임신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에스더를 낳은 뒤 남편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3년 뒤인 1897년 다시 조선으로 와서 제일 먼저 평양에 기홀병원을 개원하였습니다. 이 병원은 홀의 유산과 그의 별세 후 들어온 조의금을 가지고 세운 것입니다. 원장은 폴웰, 부인과장은 로제타 홀이 직접 맡았습니다. 이것이 곧 평양에서 제일 먼저 개설된 서양식 병원으로 평양 출신 중 이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에 온지 불과 3개월만에 딸 에스더가 이질에 걸려 죽게 되어 양화진에 아버지 홀과 함께 묻혔습니다. 장례식을 집례한 아펜젤러 목사님은 참석하지 못한 어머니 로제타 홀에게 “당신의 가족은 이미 절반이 하늘나라에 가 있습니다”라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렇게 홀 부부는 조선민족을 섬김으로 주님에 대한 자신들의 뜨거운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세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요 21: 17)